한 우물을 파라, 그 속에 길이 있다
한 우물을 파라, 그 속에 길이 있다
  • 한동직 기자
  • 승인 2007.09.03 12: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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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한전 전력계통건설처 지중선부, 양희갑 부장

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의 한 부분이다. 한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린 이들에게 성공을 비결을 물으면 한결같이 ‘그 일을 천직으로 삼았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은 맡은 일에 소명의식을 갖고 성실히 임해 왔다는 얘기일 것이다. 진정한 자기의 일을 찾아 한 길을 가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결과를 염두에 두어야 할 수 있는 얘기일 것이다. 그곳에서 원하는 물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누구도우물을 파는 작업에 목을 매지 않으리라.

예전 사막의 유목민들은 며칠을 머물게 될 경유지에서 우물을 팔 때 한 곳만을 파지 않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수맥이 흐르는 곳에 몇 군데의 우물을 파둔다.

그들이 떠난 후 다른 부족이나 적이 그 우물을 마시고 기력을 찾아 해를 입게 될 수도 있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다시 운명처럼 그곳으로 돌아올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의 한 부분이다. 한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린 이들에게   성공을 비결을 물으면 한결같이 ‘그 일을 천직으로 삼았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은 맡은 일에 소명의식을 갖고 성실히 임해 왔다는 얘기일 것이다. 진정한 자기의 일을 찾아 한 길을 가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77년 5월, 한전 첫 근무,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시작
도시가 팽창되면서 거리에는 점점 전봇대가 사라지고 있다. 도시에서 이제 전봇대는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 지도 모르겠다. 한 우물을 파듯 지중선 분야에서 37년을 일해 온 양희갑 부장을 만나러 명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명동에는 서울시 등록문화제 1호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명동은 1920∼30년대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가장 먼저 통신시설과 전기가 가설됐다. 다방과 카페, 극장, 양복점 등이 밀집한 도심 한 가운데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세워져 한전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최고의 신식 건물이었던 이 건물은 1979년 여의도로 한전 본사가 이전하고 다시 1981년 강남으로 옮기면서 현재는 한전 서울지역본부 등 3개 사업소가 입주해 있다.

오래전 그곳에서 근무했던 한 분에 따르면 1998년 이후 창문, 엘리베이터 등이 교체됐고 천장에서 달랑거렸던 전등도 형광등으로 바뀌어 이 건물에서 1920∼30년대 당시 사무실 풍경은 찾기 힘들다고 한다. 낡은 현관문과 중앙의 목재난간, 벽면의 타일 정도에서 77년 전의 흔적을 조금은 볼 수 있다.

그래도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한 외양 덕분에 한전 사옥은 지난 2002년 2월 14일 등록문화재 1호로 지정됐다. 현재 이곳에서 근무하는 한전의 한 직원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자부심은 있지만 소음 차단이 잘 되지 않는 등 근무 환경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은 편”이라고 말한다.

다시 70년 전의 경성전기주식회사를 들어가듯 옛 건축양식의 현관을 지나서 4층에 올라 전력계통건설처 지중선부의 양희갑 부장을 만났다. 그는 한전에 입사하게 된 동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 당시 양 부장은 군대 제대 후 자동차 전장품인 와이퍼 모터, 히터모터, 알터네이터, 스테터 등을 만드는 뚝섬에 있는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집(안양)에서 일터인 뚝섬까지는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됐다.

그 이전부터 버스를 타면 책을 읽곤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날은 버스를 타고 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신문하단에 한전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게 됐다. 그것이 그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큰 호기심으로 응시한 후 입사시험을 거쳐 합격하게 돼 77년 5월, 한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양 부장은 그것은 새로운 도전이자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시작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때까지 전기에 관한 자격증을 한 가지도 취득해 놓은 게 없어 회사 퇴근 후 공과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때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 자격증을 따게 된 것이 주효해 입사시험에 합격된 것 같다.”

▲ 1930년대 경성전기주식회사 시절의 한전 명동 사옥 모습
▲ 서울사업본부, 전력계통건설처 등이 입주해 있는 현재의 한전 명동 사옥 모습

한전 근무한 지 30년, 자타가 공인하는 지중선 전문가
양 부장은 지금, 한전에 근무한 지 30년을 넘기고 있다. 그동안의 한전 생활을 반추해 보면 77년 5월 사원연수원(현 중앙교육원)에 신입사원 교육생으로 들어가 교육을 수료한 77년 7월, 송변전건설사무소에서 첫 실무를 접하게 됐다.

첫 실무부서는 지중선과였는데 그 당시 지중선과 업무는 대도시(서울, 부산, 인천)에 66kV, 154kV의 송전선로의 전력케이블을 도로의 지하를 통해 포설하는 건설작업의 설계와 감독을 하는 일이었다.

지중설비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78년 3월, 송변전 건설사무소의 지중선과를 모체로 지중선사무소가 신설되면서 66kV, 154kV급 지중선 건설 업무와 서울전력건설처에서 22kV급 지중 업무를 관장하던 조직과 설비가 지중선사무소로 이관돼 마침내 22kV에서 154kV까지의 지중선 건설과 운영을 한 사업소에서 하게 됐다.

양 부장은 89년 7월, 과장으로 승격된 후에도 94년 2월까지 지중선사업처에서 근무하며 지중선의 운영분야에서 9년, 건설분야 8년 동안 전문적 영역인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업무 노하우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그 후로는 94년 2월부터 97년 3월까지는 서울전력관리처의 중부전력소에서 일을 봤고 97년 3월부터 2002년 3월까지는 전력계통건설처에서, 02년 3월부터 03년 5월까지는 창원전력관리처에서 근무했다.

또한 03년 5월부터 현재까지는 전력계통건설처에서 지속적으로 22kV부터 345kV까지의 지중선 건설과 운영분야에서 근무해 온 자타가 공인하는 지중선 전문가다.

 

▲ 지중선부 직원들이 지중작업을 하고 있다.
“그저 묵묵히 내게 맡겨진 일에 묻혀 바쁘게만 살아왔다”
양희갑 부장의 고향은 충남 부여군 남면이다. 남면의 남성초등학교에서 3학년 때 안양으로 전학 와 지금까지 안양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안양이 제 2의 고향이 됐다.

고향에서의 생활은 비록 짧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고향에 대한 추억은 그에게 강렬하게 남아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친구들과 여름철 메뚜기와 참게 등을 잡던 기억, 들과 산으로 마음껏 뛰어놀던 그 때의 기억이 그에게는 아직도 향수로 남는다.

“학교 근처에는 비사표로 유명했던 남성성냥공장이 있었는데 웬일인지 그곳에서는 불이 자주 발생하곤 했다. 불이 나면 전교생이 나서 성냥공장으로 달려가 길게 한 줄로 늘어서서 물주머니를 날라 불을 껐다. 그러면 화재의 잔재를 다 털고 난 그 공장측에서는 고마움의 표시로 공책 한권씩을 주기도 했던 기억이 종종 나고는 한다.”

그 시절에는 어느 지방이나 마찬가지로 소위 보릿고개라고 불리는 춘궁기가 있었는데 이때는 초등학교에서 옥수수가루, 우유가루를 나눠줘 그나마 먹을 것이 모자랐던 시기의 아이들에게 영양이 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시골의 어느 집에나 큰 가마솥이 있었다. 지금과 달리 먹을 만한 요리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던 시절이라 그 가마솥에 기름을 바르고 옥수수가루와 우유가루를 적당히 섞어 가마솥 전체에 빈대떡처럼 발라 부쳐 먹었는데 그 맛이 또한 일품이었다.”

그가 살던 남면의 고향 마을 앞에는 언제나 말없이 흘러주던 냇물이 있어 늘 고향사람들을 푸근하게 안아주었다. 요즘은 아주 먼 기억에만 있던 고향을 가끔은 찾아보기도 한다.
“몇몇의 친척 외에는 아는 이도 별로 없는데 문득문득 초로의 나이가 다 된 또래의 사람들이 아는 체를 해와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그래서 새로운 것, 신기한 걸 보면 그것을 소유하거나 만져보고 또는 분해를 해 봐야 직성이 풀렸다. 어린 시절 대형 괘종시계. 손목시계,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을 분해 조립하다가 망가뜨려 부모님께 혼나기도 많이 했다고.(가끔은 얼떨결에 고치기도 했지만…)

“한 번은 동네사람이 고장 난 오토바이를 고쳐보라고 해 분해 후 재조립을 하는데 3일이 걸렸는데 오토바이 주인이 죽치고 앉아 기다리는 통에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집에는 공구들이 쌓여있다. 가끔 동네사람들이 자기 집 수도나 전기 등이 고장 나면 그에게 SOS를 요청해 손을 걷어 부치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가정집의 고장이란 의외로 간단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가장집의 인입전원이 100V에서 200V로 승압됐는데도 인입점에 강압트랜스를 사용하는 집이 의외로 많아 동네의 몇 집은 200V로 사용할 수 있게 바꿔주기도 했다.”

양 부장은 6남매의 맏이고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가끔은 새로운 곳으로 이사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환경이 바뀌는 걸 싫어하시는 노모 때문에 고향을 떠나 안양에 온 후로 이곳을 떠나 본 적이 없다.

양 부장은 두 살 터울의 남매를 두고 있다. 큰 딸은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고 아들은 대학을 졸업할 예정이다.

“내가 뭘 특별히 잘해 줬다고 할 만한 것도 없고 그저 묵묵히 내게 맡겨진 일에 묻혀 바쁘게만 살아왔는데 아이들이 잘 자라 줘 흐뭇하고 그동안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아이들이 대학까지 마치는데 든든한 힘을 실어준 회사에도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지중송전 30년사’ 발간, 정년 앞둔 그의 조그만 자부심
현재 그는 345케이블의 설계, 시공을 담당하고 있으며 케이블을 수용하는 전력구에 모든 설비를 감시, 제어하는 종합감시설비와 전력구 내 수용된 케이블에서 발생하는 열을 낮추기 위한 냉각설비의 설계와 시공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345케이블이 지중선 초기인 97년도에는 OF케이블이었지만 이제는 XLPE케이블로 시공하고 있으며 97년 이후 2006년까지 10년 동안 345kV 케이블 건설량이 220C-km이었지만 앞으로 2015년까지 350C-km를 건설해야 함으로 조직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78년도에는 지중선사무소가 발족되면서 지중선로에 대한 건설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2kV에 대한 운영은 서울전력관리처의 조직이 그대로 흡수돼 별문제는 없었지만 154kV OF케이블에 대한 운영은 경험자가 별로 없어 체계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순시일지, 유압설비 점검일지 등을 현장실무에 맞게 작성하고 활용토록 함으로서 효과를 거뒀다. 또한 전력구 운영지침, 순시일지 등을 개선하고 지금도 활용하고 있는 순시일지는 그 당시 작성 활용됐던 것을 근간으로 몇 번에 걸쳐 개정되기도 했다.

업무를 추진하면서 가끔, 그는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것은 지중분야의 전문가가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떤 업무를 추진함에 있어 벽에 부딪칠 때면 그 한계에서 느끼는 답답함이 더욱 크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으로 인해 큰 틀이 흐트러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또한 전력케이블의 설계와 시공에 관한 기술이 초기부터 외국에서 도입한 기술이다 보니 그에 관련된 자료들이 부족하고, 검토한 자료들이 있어도 데이터베이스화 돼 있지 않아 이들을 찾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비록 부족하지만 양 부장 등 몇몇 사람들이 노력해 1971년 이후의 지중분야에 대한 기술적 노하우 등을 모아 펴낸 ‘지중송전 30년사’를 2004년도에 발간해 나름대로 자료화함으로서 일역을 담당했다는 것이 내년 정년을 앞두고 갖는 그의 조그만 자부심이다.

“저는 ‘I CAN’이란 단어를 좋아합니다. 이 말이 ‘나는 할 수 있다’라는 긍정의 사고여서 더욱 값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양 부장의 모습은 혈기 왕성하게 지중을 호령하던 40대의 그것이었다.

 

“전문가가 되려면 한 분야라도 깊고 다양한 지식 쌓아야”
그는 지금도 새벽에 깨어 골프연습장을 찾아가 1시간 30분가량 골프채를 휘두르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정도로 건강을 위해 스스로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한참을 땀 흘리고 샤워하면 몸이 가뿐해지고 정신도 상쾌해져 그가 몸무게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최근 공학도가 줄어들고 특히 기계. 전기 등 우리나라의 중추 산업을 이끌던 예전에 인기학과인 기계, 전기학과 등에 젊은이들이 지원을 꺼리고 있다는 뉴스는 그리 달가운 소식이 아니다.

하지만 선배들의 뒤를 이어 내일, 그곳에서 꿈을 펼쳐보기 위해 후배들이 우리나라의 전력 생산을 넘어 세계의 전력 수출의 큰 몫을 담당하게 될 한전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한전은 설비가 다양하기 때문에 배울 것도 많고 공부할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행해야만 얻을 수 있는 열매와 같지요. 자기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축적해 가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한 분야라도 깊고 다양한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양희갑 부장이 후배들을 위해 전하는 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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