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는 사올 수도 빌릴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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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과 전력은 안보의 중요한 두 축
태극기 퍼레이드와 추모시 낭송, 살풀이 춤 공연 등으로 시작한 이날 행사에서는 6.25 전후 전력상황에 대한 설명에 이어 백선엽 전 총장의 전쟁 회고 등이 이어졌다. 또 군 장비 견학과 탑승체험, 전쟁 사진전, 전쟁음식 체험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특히, 이날 행사는 국방과 전력은 국가 안보의 중요한 두 축이라는 점을 되새기며, 자라나는 세대에게 역사의 진실을 널리 알리는 소중한 자리가 됐다.
파로호 전투는 “식량은 사올 수도, 빌려올 수도 있지만 전기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귀중한 자원”이라며 화천수력발전소 탈환을 요청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1951년 5월 6사단이 중공군 6만2000여 명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둔 전투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기념해 당시 화천 저수지로 불리던 이 호수에 ‘오랑캐를 무찌른 곳’이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6.25전쟁 당시 우리의 전력 사정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빈약했습니다. 당시 남한으로선 화천수력발전소 탈환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절실했고, 그래서 우리의 수많은 동료, 선배들은 피로써 이 화천댐을 지켜냈던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서서히 역사 속으로 저물어가고 있고, 살아남은 자의 훈장은 전사자들의 희생 앞에서 그저 빛을 잃을 뿐입니다.”옛 전장을 다시 찾은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93, 당시 제1군단장, 현 육군협회 회장)은 당시 화천댐을 사수하기 위한 파로호 전투에서의 동료, 선배들의 희생을 떠올리며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6사단에서 대대적으로 화천수력 탈환 작전에 나서게 된 건 이승만 대통령의 당부 때문이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중부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미8군 사령관에게 ‘발전소만은 꼭 탈환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식량은 사올 수도, 빌려올 수도 있지만 전기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귀중한 자원이라는 이유에서였죠. 당시 목숨 바쳐 이곳을 지켜낸 수많은 동료, 선배들의 숭고한 헌신 덕분에 오늘날 화천발전소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민족의 젖줄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당시 남한 전체 발전용량의 30% 담당
파로호 전투 승리의 주역인 6사단(사단장 장도영)은 1951년 5월 파로호 전투에서 적진의 전면에 1개 연대를 내보내 거점을 만든 뒤 적군을 그곳으로 유인하는 기만전술을 편 게 주효했다고 한다. 적이 혼란에 빠져들자 후방의 2개 연대를 재빨리 우회해 포위하는 전법을 구사한 것이다.
특히 6사단은 용문산과 홍천강을 잇는 선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도주하는 적을 화천지역까지 진격, 섬멸함으로써 이전의 패배를 완전히 설욕했다.
수차례 뺏고 빼앗기는 격전을 치르며 화천수력은 대부분 시설이 파괴돼 복구 없이는 정상 가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호기는 52년 3월 복구작업에 들어가 그해 7월 완료했다. 2호기는 53년 6월부터 복구에 착수, 54년 7월 완료함으로써 전체 발전용량은 5만4,000kW로 늘어나게 됐다. 이 전력량은 당시 남한 전체 시설용량 19만8,000kW의 30% 가까이를 차지하는 규모였다.
이후 화천수력은 지속적으로 발전기를 증설, 57년 11월에는 3호기를, 68년 6월에는 4호기를 준공함으로써 시설용량은 108MW로 늘어났다. 지난 88년에는 북한의 금강산댐(임남댐)에 대응키 위한 평화의 댐 건설 기초공사를 위해 화천댐 수문 아래에 5개의 비상 방류구를 만들었다. 2003년 12월에는 비상 방류구에 영구수문을 설치해 최악의 가뭄이나 홍수상황에서도 수도권의 용수 공급과 홍수조절에 기여토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