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
  • EPJ
  • 승인 2013.01.07 15: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용현의 꽁트 마당 (53)

“주택가 골목길 보안등 갈아 끼우는 거, 그걸 무슨 사업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제가 하면요, 아버지 회사를 요, 대기업은 몰라도 저명한 중소기업으로 만들 자신이 있어요.”

“뭐라? 니가 맡으면 우리 회사를 이름 있는 중소기업으로 만들어놓겠다고?”

1년 전에 대학을 졸업하고 아직 취직을 못해 빈둥거리고 있는 아들에게 그냥 한 번 떠보려고 ‘회사를 맡아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본 것인데 이놈이 대뜸 하는 소리가 이러니 한편 대견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철딱서니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하시는 보안등(保安燈) 공사, 그런 일은 안정성은 있지만 발전성은 없어요. 요즘은 인터넷 시대잖아요. 인터넷을 통해 재개발 지역이나 새로 짓는 아파트 단지의 전기설비 입찰에 응모하여 공사를 따내면 발전가능성은 무궁무진해요. 몇 군데 공사만 하면….”

아들의 말이 허풍 같지만은 않았다. 개봉동에서 조그만 전기설비회사를 운영하는 장인호 사장, 줄줄이 딸만 다섯을 낳고 마지막에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이놈이 글쎄 대학 졸업을 하고서도 취직은 못 하고 친구들하고 어울려 다니며 술 먹고 카드를 긁어대는 바람에 속 썩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런 아들이 진지하게 사업 얘기를 하니 언제 철이 들었나 싶어 흐뭇했던 것이다.

‘이놈이 그 동안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며 술이나 먹고 계집 꽁무니만 쫓아다닌 게 아니고, 아버지 회사 생각도 하고 있었단 말이지?’

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피는 것을 보고 이 때다 싶었는지 아들이 한술 더 떠서 말했다.

“아버지, 내일부터 아버지 회사에 출근할게요. 보안등 교체 작업하는 데도 따라가고요. 전봇대에도 올라갈 거예요. 자신 있어요.”

장 사장은 20여 년 동안 전봇대에 올라 다닌 베테랑이다. 전구만 갈아 끼우는 것은 별 거 아니지만 전봇대 위에서 전선을 교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아주 위험한 일이다.

“전봇대? 너는 전봇대에 못 올라가! 나도 몇 번이나 전봇대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다. 특히 삭은 전선 교체하는 일은 아주 위험해.”

“그런 단순노동은 몇 번만 해보면 금방 할 수 있어요. 제게 기사자격증도 있고요.”

장 사장은 아들이 전봇대 올라가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같아 다시 한 번 주의를 주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모처럼 아버지 일을 물려받아 해보겠다고 저러는데 초장부터 아들의 기를 너무 꺾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작년 봄에,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 일을 돕겠다고 했을 때 장인호 사장은 극구 만류했었다. 그래도 4년제 대학의 전기공학과를 나왔으니 괜찮은 회사에 취직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졸업 후 1년이 지나도록 취직을 못하는 것을 보고는 장 사장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참에 회사를 아예 아들에게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을 했다.

장 사장은 며칠 동안 회사에 나가 아들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그 후엔 아예 출근을 하지 않았다. 회사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아들 녀석이 제대로 하나 싶어 궁금하기도 하고 조바심도 났지만 일단 맡긴 만큼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송 기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러지 않아도 회사가 잘 돌아가는지, 또 함께 일하던 인부들은 잘 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아들은 거래처에 가고 사무실엔 송 기사와 경리사원만 남아 있었다. 회사 근처 호프집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 송 기사는 장 사장을 보자마자 불평을 늘어놓았다.

“사장님, 아니 회장님! 저 회사 그만둘랍니더. 젊은 사장님이 운영비 절감한다면서 점심값을 각자가 해결해라칸다 아임니꺼!”

“뭣이라고?”

“몰랐습니꺼? 젊은 사장님이 오고부터 직원들이 모두 점심값을 각자 부담하고 있습니더. 그래서 인부들도 이번 달까지만 나오고 모두 그만둘라칸다 아임니꺼.”

“알았네, 송 기사. 내가 알아서 해결 할 테니 그만둔다는 말은 하지 말게…!”

다음날, 장 사장은 아들이 출근할 때 함께 따라나섰다. 일기예보에서 오늘 영하 10도까지 떨어진다더니 아침부터 몹시 추웠다. 손가락은 오그라들고 귓불이 떨어져 나갈 듯 아렸다. 회사에 도착하니 송 기사가 인부들과 함께 전선과 공구를 차에 싣고 있었다. 오늘은 고척근린공원의 낡은 전선을 교체하는 날이다. 장 사장은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갈 테니 오늘은 너도 현장에 따라가자.”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했다. 공원이라 그런지 엄청나게 추웠다. 아들도 전봇대 위로 올라갔다. 차 위에서 인부가 전선을 집어 주면 다음 인부가 받아서 아들에게, 아들이 다시 다음 인부에게 전달하여 마지막에 송 기사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전선이 올려지기 시작했다. 어, 그런데 갑자기 전선이 올라오지 않았다. 아들 차례에서 작업이 중단된 것이다.

“뭐해! 빨리 전선 안올리고.”

장 사장이 뒤에서 소리쳤다. 아들은 벌써 기진맥진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아버지 말에 찔끔하여 다시 허리를 숙이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정오가 지나자 아들이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장 사장이 아들의 속을 꿰뚫어보듯 다시 다그쳤다.

“너, 배고프지? 그렇다고 자꾸 시계만 쳐다보면 어떡해?”

아들이 대답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오후 한 시가 넘어서야 전선 올리는 작업이 끝이 났다. 이제 오래된 선을 걷어내고 새로 올린 전선을 연결부위에 이으면 된다. 장 사장은 고개를 들어 해를 한번 올려다보고 나서 아들에게 말했다.

“힘들지? 춥고 배도 고프고….”
장 사장이 마치 네 속을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점심 먹고 할까? 아니면 일 다 끝내고 점심 먹을까?”

“아, 아버지! 배고파 죽겠어요. 점심 먹고 해요.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나왔는데….”

그때서야 장 사장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거봐라! 니가 직접 밖에 나와서 일을 해봐야 저 분들이 추운데 얼마나 고생하는지, 배가 얼마나 고픈지 알지.”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 꾸는 개똥벌레’ ‘삼국지 인물 108인전’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