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대리의 여복(女福)
고 대리의 여복(女福)
  • EPJ
  • 승인 2010.06.1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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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세 살 노총각 고철수 대리는 오늘도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요즘 시골집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한결같았다. 참한 색시가 한 사람 있으니 이번 주말에 선보러 내려오라는 거였다.

작년에는 부푼 기대를 안고 몇 번 고향에 내려갔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미련스러울 만큼 뚱뚱한 여자인데다 솥뚜껑만한 손하며….
그는 회사일이 바빠서 이번 주말에는 못 내려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미안한 나머지 다음에 참한 색시 하나 데리고 가겠다고 둘러댔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가 된 아버지의 여성관을 그는 오늘도 들어야 했다.

“모름지기 여자는 통통해야 혀. 그래야 애를 쑥쑥 뽑는 법이거든. 삐쩍 말라서 뼈다귀만 남은 도시여자들은 아무짝에도 못 써.”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새벽 두 시까지 잠도 못 자고 쓴 원고를 들고 3층으로 내려갔다. 홍보부에 들어서자마자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앞자리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예쁜 여사원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동기생인 임 대리에게 원고를 주면서 눈짓으로 그 여사원을 가리켰다. 임 대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미스 조, 인사해. 교육부의 고 대리야. 사보에 고정칼럼 쓰는 분이야. 아직 총각이고….”
미스 조가 목례를 하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게 아닌가 싶었다. 박 속 같이 하얀 피부에 조각처럼 박힌 이목구비….

교육부로 돌아온 고 대리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날 점심시간에 남자사원들이 그 여사원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며칠 전에 창업주께서 어느 백화점에서 스카우트 해온 아가씨란다. 우리 회사의 홍보자료에 모델로 쓰기 위해서. 관광경영을 전공했고 나이는 스물다섯이란다.

비싼 개런티를 주고 유명한 영화배우나 탤런트를 쓰는 것보다는 예쁜 여자를 데려다가 사원으로 쓰면서 모델 일도 시키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라는 얘기들이었다. 최고경영자의 사업 감각은 역시 놀라웠다.

얼마 후 홍보부에서 나온 각종 판촉자료는 완전히 미스 조의 사진첩이었다. 그 판촉자료가 나오고부터 사내의 총각들 사이에 불이 붙었다. 미스 조를 낚기 위한 암투의 불이었다.

안 그런 척 했지만 고 대리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남모르는 고민에 빠져 혼자 끙끙 앓았다. 명색이 간부사원이 같은 회사 여사원에게 치근대다가 딱지라도 맞으면….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미스 조가 교육부로 들어오더니 고 대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가슴이 쿵쿵거렸다. 그는 애써 외면을 하며 책상 위의 서류에 시선을 박았다. 그러나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의 앞으로 다가온 미스 조가 상냥하게 웃으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고 대리님. 이번 달 원고료 나왔어요.”
그는 겨우 고개를 들었지만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했다. 말까지 더듬었다.

“미스 조가 워, 원고료를 직접 갖다 주니 기분이 조, 좋은데요.”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는 돌아서 가는 미스 조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여자를 데리고 시골에 인사하러 가면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 그녀를 처음 본 날처럼 그 날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스 조에 대해 별의별 소문이 들려왔다. 기획실의 누구와 영화를 보러갔고 밤늦게까지 드라이브하는 것을 봤다는 둥, 홍보부의 사진기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둥.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놈들이 자가발전(自家發電)한 소문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불안하고 초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새파란 젊은 후배에게 미스 조를 뺏길 것만 같았다.

한 달이 지났다. 그는 다시 원고료 받을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그녀가 원고료를 가지고 와주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녀가 오면 주려고 며칠 전부터 메모지를 준비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녀가 왔다.

그는 원고료 영수증에 도장을 찍어주면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메모지를 함께 건네주었다. 그녀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미스 조, 오늘 저녁에 만나고 싶어요. 퇴근 후에 바로 OO레스토랑으로 와주오.’
그날 저녁, 그는 설레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약속장소(?)로 향했다. 그녀가 와주기를 고대하면서….

미스 조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날아갈 듯한 기분! 맥주를 시켰다. 그녀도 사양하지 않고 잘 마셨다.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예뻤다. ‘예쁜 여자는 무엇을 해도 예쁘구나.’ 그는 더듬거리면서 ‘사귀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만나 뵙고 싶었어요. 고 대리님이 쓰시는 원고, 제가 제일 먼저 읽잖아요. 저는 고 대리님 팬이에요. 우리 건배해요.”
그녀는 생각보다 활달하고 시원시원했다.

그와 미스 조가 만난다는 소문이 회사에 퍼지고 있었다. 그 소문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미스 조의 주인이 그임을 만천하에 공인 받는 효과가 있었으므로.

며칠 후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맥주를 여섯 병이나 마셨다. 미스 조의 주량도 만만치 않았다. 드디어 그는, 사랑을 고백하고 더 이상 소문이 퍼지기 전에 시골 부모님께 인사하러 가자고 말할 참이었다. 그 때, 계속 맥주를 들이키던 그녀가 갑자기 옆에 있는 핸드백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담배 좀 꺼내주세요. 고 대리님이 담배를 안 피우시니까 참느라고 혼났어요. 저, 담배 피워도 되죠?”
“예, 뭐 어때요. 요즘은 여자들도 많이 피우잖아요.”
그녀의 혀가 상당히 꼬부라져 있음을 느끼면서 엉겁결에 대답했다.

핸드백을 열어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려는 순간, 또 하나의 물건이 눈에 띄었다.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슴에서 무엇인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그것은 분명 콘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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