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공개의무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공개의무
  • EPJ
  • 승인 2009.10.0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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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수년 전, 야간에 가정집에 침입해 여성들을 연쇄 성폭행한 사건의 범인으로 구속 기소된 P의 국선변호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 처음 구치소 접견에서 P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범행을 부인했지만 그의 형상과 태도는 유죄를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경찰은 범행이 발생한 마을을 새벽에 배회하던 P를 범인으로 단정 짓고 위협수사를 한 결과 범행자백을 받아 냈다. 유죄 입증은 검찰의 몫임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의 자백은 다른 수사상의 하자나 의문을 잠재웠고 1심법원은 피고인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피고인에 대한 수사는 허점이 많았고 동일한 상황에 대한 진술의 일관성도 없어서 피고인이 강압에 의해 허위자백을 하게 됐음을 확신하게 됐다. 필자는 항소심의 변호인으로 범행 현장을 검증하고 현장목격 증인들의 증언을 탄핵하는 등 피고인의 무죄를 끌어내려고 노력한 결과 항소심과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아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후 같은 경찰서에서 동일 죄명으로 다시 P가 구속된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다시금 1년여 동안 법정다툼을 한 결과 일심법원 유죄, 항소·상고심은 무죄를 받게 됐다.

이 과정에서 수사 중 경찰이 P의 DNA에 대한 감정을 의뢰한 사실을 재판 도중에 알게 된 필자가 수사기관에게 감정결과의 공개를 요구했으나 당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대답만 들었다. 그리고 항소심 재판이 끝날 무렵에 수사기관은 감정결과를 입수했음에도 재판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미국 변호사협회(ABA)의 윤리장전 3.8(d)에 따르면 ‘검사는 피고인의 무죄 또는 피고인의 형을 감경시키는 증거나 정보를 알게 되면 이를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적시에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는바, 피고인의 양형상 유리한 증거에 대한 공개의무를 검사에게 부담지우고 있다.

설사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가 신빙성이 떨어져 증거가치가 희박하다고 판단되더라도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는 배심원을 설득하거나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므로 검사는 이를 공개할 의무가 있다. 나아가 수사검사를 지도하거나 당해사건을 지휘하는 상급검사도 증거공개의무의 준수여부를 지도 감독할 의무를 가진다.

우리도 수사기관이 수사나 공소유지 과정에서 획득한 피고인에게 유리한 무죄 증거를 피고인과 그의 변호사 그리고 재판부에 알릴 의무를 부담시키는 규정을 둘 필요가 있다. 피의자나 피고인의 방어권보장이나 인권보장은 단순히 피고인과 그의 변호인만의 문제가 아니며, 수사기관을 포함한 사법기관 전체가 추구할 가치이다.

실체적 진실을 밝혀줄 유력한 증거를 변호인이 은폐해 진실발견을 방해해서는 안 되듯이 수사기관도 피고인이 당해사건의 진범이 아니라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입수하면 이를 공개해야 한다.

필자의 사건에서도 검찰이 DNA 감정결과를 알게 된 즉시 공개했더라면, 힘없고 불쌍한 피고인이 2년씩이나 구속 수감되는 불법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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