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를 든 남자
기타를 든 남자
  • 박기웅 기자
  • 승인 2009.08.10 16: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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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 ⑫

막내 동생 윤미의 귀가가 늦어지기 시작한 건 한 열흘쯤 전부터였다. 보통 저녁 8시, 늦어도 10시 이전에는 들어왔는데 요즘은 거의 12시가 다 돼어서야 들어왔다. 회사일이 많아 매일 야근을 한다고 했지만 아닌 것 같았다. 내 직감으로는 남자가 생긴 것 같았다. 내가 집요하게 추궁하자 결국 실토를 했다.

그 남자를 만난 건 예상대로 열흘 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한 편 보고 헤어져 집에 오는 길에 전철 안에서 만났단다. 마침 자리가 나서 앉았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앞에 다가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더란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노래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단다. ‘너를 사랑하기에 저 하늘 끝에…’ 하면서 쳐다볼 때는 온몸에 무언가 짜르르 흐르는 것 같더란다. 노래를 마치자 선반에서 꽃다발을 내려서 내밀더란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자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았고, 다음 역에서 함께 내렸단다. 나이는 윤미보다 열 살이나 많은 서른셋이었고, 직장을 다니다가 뜻한 바 있어 사표를 내고 고시원에 기거하며 무슨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단다. 머리를 식히러 대학로에 왔다가 윤미를 뒤따라왔단다.

그는 매일 윤미의 퇴근시간에 맞춰 사무실 앞에서 기다렸고, 두 사람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대학로에 갔단다. 함께 떡볶이를 사먹으며 길거리에서 공연을 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연극을 보거나 배드민턴을 치기도 했단다. 나이가 많은 것이 좀 마음에 걸렸지만, 전철에서의 그 환상적인(?) 프로포즈에다, 능숙한 말주변, 그리고 정치 경제 문학 예술 등 다방면으로 아는 게 많은 점이 마음에 들었단다.

나는 그 남자를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나봐서 합격이면 계속 만날 수 있지만 불합격이면 헤어져라”고 말했고 윤미도 동의를 했다.

며칠 뒤 집 근처의 카페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 훤칠한 키에 얼굴도 잘 생긴 편이었는데 한 마디로 건들거리는 인상이었다. 텁수룩한 머리에다 무슨 잠바를 입었는데 대학생 흉내를 내는 것 같아 영 못마땅했다. 나이도 꽤 들어 보였다.

나는 나이가 몇이냐고 물으며 주민등록증 좀 볼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가 주춤거리며 꺼낸 주민등록증을 보니 나와 같은 서른다섯이었다. 윤미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띠 동갑이었다. ‘서른셋이라더니….’ 하며 내가 나이 속인 것을 추궁하자 그는 호적이 잘못 됐다고 둘러댔다. 윤미도 주민등록증은 처음 본 듯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부모는 어디 계시며 그 나이가 되도록 장가는 왜 안 갔는지,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한꺼번에 물었다. 부모는 시골에 계시고 내년 2월에 있을 변리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으며 다시 직장을 잡은 뒤에 결혼을 할 거란다.

시험 준비한다는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다시 추궁하듯 물었다. 내년 2월에 시험이 있으면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 공부는 언제 하느냐, 또 그 나이에 기타 들고 대학로를 돌아다니는 것이 가당키나 한 거냐고.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너무 몰아붙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나는 “윤미는 나이도 어리고 아직 시집 갈 때도 안 됐으니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도 알았다며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윤미에게도 단호하게 말했다.
“나이 속인 거 봐. 순진한 여자 등 처먹는 건달이야. 시험은 무슨 얼어 죽을 시험, 코피 터지게 공부해도 될까 말까 한 나이에 여자꽁무니나 쫓아다니고. 너 그 남자 다시 만나면 집에 못 들어올 줄 알아. 아버지한테 일러서 시골집에 내려 보내 버릴 거야. 어디 사람이 없어 그런 늙수그레한 백수건달을….”

그 후 며칠 동안 윤미도 일찍 집에 들어왔다. 그 남자로부터는 연락도 없고 회사 앞에서 기다리는 일도 없었단다. 나도 ‘이제 확실히 떨어졌구나.’ 하고 안심을 했다.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 윤미가 아무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핸드폰은 꺼져있었고. 다음날 아침에야 윤미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출근길이라며 나중에 집에 가서 모두 얘기하겠다고 했다. 더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녁에 윤미가 오자마자 ‘어제 어디서 잤느냐? 그 놈 또 만난 것 아니냐?’ 고 추궁을 했다.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미가 마침내 울먹이며 ‘언니, 잘못 했어. 나 그 남자한테 당한 거 같애.’ 하며 입을 열었다.

어제 퇴근을 하는데 그 남자가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더란다. 할 얘기가 있다면서. 결국 함께 택시를 타고 미사리에 있는 카페로 갔단다. 내게 전화를 하려고 했더니 그 놈이 눈치 채고 핸드폰을 빼앗아 꺼버리고 안 주더란다. 함께 술을 마셨단다.

할 얘기가 뭐냐고 물었더니 “언니가 반대를 하면 방을 얻어 함께 살자”고 하더란다. 그리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단다. 술을 마시다가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깨어보니 옷을 모두 벗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고, 그 놈은 옆에 곯아떨어져 있더란다. 러브호텔 안이었고, 창 너머에 동이 트고 있더란다.

옷을 입고 혼자 방을 나와 택시를 타고 출근을 했는데 하루 종일 아랫도리가 가렵고 따끔거리더란다. 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런 놈은 잡아서 콩밥을 먹여야 돼. 그래야 다시는 기타 들고 다니며 순진한 여자 못 울리지.”
다음날 아침,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는 윤미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산부인과에 갔다. 진찰을 마친 의사가 하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또다시 이를 악물어야 했다.

“임질 같습니다. 정확한 건 검사결과가 나와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일주일 정도는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작가·(사)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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