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다
겨울바다
  • EPJ
  • 승인 2009.01.1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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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마당]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아이였다. 그래, 오늘이군. 그 애와 만나기로 한 날이.

내 의식은 어느새 기억 속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내가 그 아이를 알게 된 것은 오래 전, 첫 직장인 OO생명보험회사의 교육부에 근무하던 때였다. 그때 나는 사보에 ‘인간의 편린’이란 타이틀로 고정칼럼을 쓰고 있었는데, 직장생활의 따분함과 무력감에서 벗어나 보려고 쓰기 시작한 글이 의외로 반응이 좋아 계속 쓰게 되었다.

그 칼럼 때문에 나는 일약 회사 내의 명사(名士)가 되었고, 여사원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도 받았다. 그 화려했던 시절의 얘기다.

1월 21일,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우리 회사의 월급날이었다. 나는 그때 대리로 승진하여 일선 영업소장으로 발령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날은 내가 3년여 동안 몸담고 있던 교육부에서 마지막 작품으로 썼던 영업소장의 아침조회용 교재 ‘화제의 샘’의 교정을 보러 인쇄소로 갔던 날이었다.

인쇄소에서 일을 마치고 한시 반 쯤, 다들 퇴근했겠구나 생각하며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미스 손, 그 아이가 전화를 받았다. 일년 전에 여고를 졸업한 우리 과의 막내. 앳된 얼굴에다 단발머리를 고수하고 있는, 그러나 때로는 당돌한 행동을 하는 문학소녀.

“미스 손, 나야. 아직 퇴근하지 않았어?”

“예, 대리님 전화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대리님 월급봉투는 제가 갖고 있어요. 어떻게 할까요?”

“응, 그러면 종로 2가 YMCA 옆 OO커피숍 알지? 두 시까지 그리로 와. 지금 그리로 갈께.”

“예, 알았어요.”

커피숍에 들어서니 그 아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월급봉투를 받아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우리 영화 보러 갈까, 아니면 인천 가서 겨울바다나 볼까?”

“바다 보러가요. 겨울바다는 동해안이 좋대요. 우리 강릉가요.”

의외의 제의였다. 나는 좀 당황하긴 했지만 여자가 동해안 가자는데 굳이 인천에 가자고 우길 만큼 미련하지도 늙지도 않았었다.

“지금 동해안 가면 오늘 못 돌아올 텐데, 그래도 괜찮아?”

“예, 저는 괜찮아요. 같이 있는 친구한테 전화해주면 돼요.”

우리는 곧바로 일어나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 마침 40분 후에 출발하는 표가 있어 간단히 점심요기를 하고 강릉행 고속버스에 나란히 앉았다.

“대리님, 제가 어떻게 우리 회사에 오게 됐는지 아세요?”

차가 출발하자 그 아이가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학교로 매달 보내오는 우리 회사 사보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실린 내 글을 읽고 그 후 매달 사보를 기다렸단다. 3학년 때 우리 회사의 입사시험에 응시, 합격을 했고 인사부 면접 때 일부러 내가 있는 교육부로 지원해서 왔단다.

“대리님의 글이 왠지 좋았어요. 내용도 재미있었고요. 제 친구들도 그랬어요. 매월 사보가 나오면 대리님의 글을 오려서 스크랩해 두었어요.”

차가 태백산맥을 느릿느릿 오르고 있었다. ‘눈이 와요!’ 그때 차안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함박눈이 차창을 때리고 있었다. 바깥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참, 대리님 책상위에 가끔 메모지 있었죠. 그거 제가 그랬어요. 제 글씨 알아볼까봐 일부러 타자로 쳤어요. 대리님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몰래 웃곤 했어요.”

나는 아침에 머리감기가 귀찮아서 세수할 때마다, 까치집을 지은 머리를 더운 물로 눌러서 펴곤 했었다. 며칠씩 그렇게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땐 과감히 머리를 감는데, 머리를 감고 출근하는 날엔 잠시 자리를 떴다가 돌아오면 가끔 책상위에 메모지가 있었다.

‘대리님, 머리를 감으시니까 정말 멋있어요.’

처음엔 몹시 당황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그러나 내 게으름병은 쉬 고쳐지지 않았다.

그 아이는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했다고 했다. 대학에 간 친구들은 일부러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왠지 거리감이 생긴다며….

‘그건 열등감 때문이야.’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강릉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때렸다. 그 아이가 내 팔에 바짝 붙으며 말했다.

“따뜻한 곳으로 가요. 바다는 내일 보고요.”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가까운 여관으로 들어갔다. ‘대리님은 저의 첫 남자예요’ 하며 그 애가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밤새 나 자신과 싸워야 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주위가 온통 은백색 눈으로 덮여 있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경포대로 향했다. 길 옆 경포호에는 군데군데 낚시꾼들이 얼음을 뚫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택시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아, 수평선! 파도가 무서운 기세로 밀려왔다가 포말이 되어 부서지고 있었다. 바다의 거친 숨소리가 아우성치며 내 가슴에 잠겨왔다. 검푸른 바다는 뜨거운 입김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가슴 가득히 겨울바다를 담았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조용히 그 애에게 일렀다.

“대학에 가도록 해. 직장생활하면서 번 돈으로 책도 사고 저녁에 학원에도 다니고. 넌 충분히 대학에 갈 수 있어. 그리고 앞으로는 네 또래의 남자와 교제하도록 해. 우리, 다시 이런 시간 만들지 말자. 난 아마 이번 주에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날거야.”

“그러면 대리님, 우리 일 년에 한 번만 만나요. 매년 오늘 저녁에 그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해요.”

나는 어설프게 ‘응’ 하고 대답을 했다. 우린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나는 며칠 후 안양영업소장으로 발령을 받아 임지로 떠났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매년 약속한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한 번도 그 커피숍에 나가지는 않았다. 그 애가 대학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누군가로부터 들었다. 지금쯤 결혼해서 중년 부인이 되어있겠지. 그 사이 나는 직장을 옮겼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오늘은 꼭 나오라고 회사로 전화가 온 것이다.

나는 그 애와 함께 보았던 검푸른 동해바다를 떠올리며 회사 문을 나섰다.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날처럼….

<작가·(사)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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