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게 울려퍼지는, 철없는 네 남자의 신나는 樂밴드 이야기
신나게 울려퍼지는, 철없는 네 남자의 신나는 樂밴드 이야기
  • 송지예
  • 승인 2007.12.10 23: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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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재발견] 즐거운 인생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이십대 초·중반의 세월을 보냈던 이들이여, 기억하는가. 때는 바야흐로 권위적인 독재 권력에 맞선 검푸른 청춘들이 주먹 불끈 쥔 채 민주화를 부르짖고, 독일의 바덴바덴에선 24회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란 두 글자가 울려 퍼지기 직전이다.

대학가에서는 뜨거운 고뇌와 낭만을, 비록 현실은 비루할 지라도 그 미래만은 찬란했던 자유로움을 노래하던 때가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젊음이란 쓰라리면서도 달콤한 그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낡고 헤지듯 원대한 포부는 냉혹한 현실을 밟고 미끄러지기 일쑤요, 결국 희미해지는 건 꿈이고 짙어지는 건 주름 속에 켜켜이 박힌 한숨뿐이었다.

자식들은 말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부모님의 어깨는 더욱 더 좁아 보인다고. 나약한 당신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로 죄스럽다고. 하지만 부모라 한들 어디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던 열정 하나 없었겠는가. 이준익 감독의 영화, <즐거운 인생>에서는 잠시(혹은 아주 오랜 세월)동안 묻혀있었을 그 열정들이 우연한 기회로 조우하게 된다. 자칫 갈라지고 부서져 그대로 사라질 뻔했던 ‘록 스피릿’의 퍼즐들이 하나씩 모아져 완성되려는 순간이다.

락밴드 <활화산>, 불터오르지만 다시 해체 위기...?!

대학 시절 결성한 활화산 밴드의 멤버였던 기영, 성욱, 혁수는 리더 상우의 장례식장에서 만난다. 그들은 비록 대학가요제 3회 연속 탈락이라는 비운의 밴드였지만 활화산이란 이름만큼 악기와 마이크 하나면 목청이 터지도록 ‘터질 거야’를 불렀더랬다. 약간은 촌스러운 로고가 가슴팍에 그려진 흰 반팔 티를 입고 자랑스레 포즈를 취하던 네 명의 멤버들의 모습은 이젠 빛바랜 사진 한 장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학교 선생인 아내에게 생계를 의탁한 백수 기영은 상우의 유품인 기타를 들쳐 매고 다시 한 번 ‘록밴드’로 뭉쳐보자고 나머지 멤버들을 꾀어보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성욱은 낮에는 택배기사, 밤에는 대리운전 기사로 언제나 잠이 부족했고, 혁수는 자식들과 아내의 캐나다 생활을 뒷바라지 하느라 바쁜 기러기 아빠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처구니없는 기영의 투정에 괜히 마음 짠한 동요가 인다. 너무나 긴 세월, 즐기는 삶보단 참고 견디는 삶에 가까웠던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던 이들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진정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타지에서 생활하는 아내를 위해, 공부에 특출 난 재능을 보이는 아들을 위해, 내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서 곯아떨어진 취객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 자신을 위해 스스로 택하고픈 일이 드디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마흔 넘은 중년의 마음에 꽃을 피우기 위해 다시 일어섰다. 리드기타 하나로 여심을 사로잡고, 묵직한 베이스 음으로 폼 잡고, 파워풀한 드럼 스틱 쇼로 제법 인기몰이를 하던 이십 여 년 전의 그 시절을 꿈꾸며 활화산 밴드가 재결성됐다. 락 자체를 사랑하던 자유로운 영혼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 기름칠을 하지 않아 녹슬어버린 기계의 성능은 갈라지는 목소리와 불협화음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뭉치자마자 무력감에 빠져 활화산이 휴화산으로 이름을 바꿔야 할 지경에 온 순간 그들에게 구세주와도 같은 이가 나타났으니 바로 리더였던 상우의 아들이었던 혁준이었다.

혁준의 지도 아래 조금씩 몸도 마음도 생기를 되찾게 된 기영, 성욱, 혁수는 젊은이들의 상징이라 일컬어지는 홍대 클럽에서 관객들의 마음을 휘어잡기도 하고, 일을 하는 내내 끊임없이 자신의 악기를 연습하며 행복감에 젖어 든다. 그러나 현실이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의 곁에는 그들에게 의지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기영은 아내로부터 바람  피우는 것 아니냐며 오해를 받고, 남편이 복직가능성이 없다는 소식을 알게 된 성욱의 아내는 집을 나가 버린다. 혁수는 캐나다에 있던 아내로부터 일방적인 이혼 통보를 받는다. 아무리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는 세상이라지만 정말로 힘들게 내 의지로 택한 결정의 대가는 참으로 씁쓸했다.

과연 그들의 꿈은 여기서 막을 내려야 할 것인가. 하지만 이것은 제대로 인생의 가시밭길을 관통하는 정 중앙으로 유유히 걸음을 옮길 법한 사람, 바로 이준익의 영화다. 이준익 감독은 ‘꿈을 찾아낸 모두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라는 꿈을 꾸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네 명의 남자들은 반드시 행복해져야만 한다. 브레이크 고장 난 폭주마차처럼 질주하던 청춘의 시기에도 분명 시련과 역경은 존재했다. 오로지 가진 거라곤 열정과 꿈 밖에 없던 영혼에게 현실은 냉혹한 손끝으로 가차 없이 할퀴고 채찍질 했다. 하지만 떠올려보라. 어쩌면 그런 것들이 남긴 상처가 단단히 아물고 또 아문 자리야 말로 지금까지 이 땅에 발붙이고 꿋꿋하게 살아 버텨주게 만든 힘이 아니던가.

이준익의 <즐거운 인생> VS 피터 카타네오의 <폴몬티>

아마도 <즐거운 인생>를 관람한 많은 사람들은 피터 카타네오 감독의 <풀 몬티>를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300만 달러의 저예산 영화임에도, 개봉 당시 전 세계에서 영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관객동원을 기록했던 기록도 기록이지만 개봉 년도가 1998년도라는 것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IMF시대라 불리는, 바로 경제 악화로 인한 구조 조정 등으로 인해 실업률이 증가하고 모든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야만 했다. 탄광 산업의 침체로 실업자가 대량 발생했던 영국 셰필드 지역에서 무능력한 남자들의 표본이었던 네 명의 백수들이 모여 성공적인 스트립 쇼 공연을 열었다는 <풀 몬티>의 스토리는 참신한 소재에 대한 이목과 함께 많은 남성들의 공감대를 형성했었다.

<즐거운 인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스트립 쇼의 목적이 무엇보다도 재정적으로 소득을 얻기 위한다는 점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무력했던 자신으로부터 탈피라는 점에서는 분명 비슷한 맥락으로 이어진다. 단 한 번의 스트립 쇼 공연에서 그들은 그저 기운 없는 보통남자가 아닌 네 명의 완벽한 스트리퍼로 다시금 태어났다. 결국 활화산의 멤버들 또한 네 명이 함께라면 못할 게 없던 과거의 그 때처럼 새롭게 뭉쳐 ‘즐거운 인생’을 시작할 새 터전을 마련한다. 바로 그 곳에서 그들의 새로운 두 번째 노래 ‘즐거운 인생’은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의지의 노래로,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목청껏 터져 관객들-그러니까 그들을 그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도와 준 친척, 친구, 동료들-에게 울려 퍼졌다.

이 글을 보는 당신의 가슴이 조금이라도 뜨거워졌다면 이미 어떤 꿈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제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르는 대신 꿈틀거리는 열정의 씨앗에 싹이 날 때까지 정성껏 물을 주는 건 어떨는지. 왜 밴드를 하냐는 아내의 말에 기영은 이렇게 답하지 않았는가. “하고 싶으니까, 너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고.

가족들을 위해, 혹은 사회를 위해 묵묵히 살아왔던 그대들이여. 지금도 참고 견디는 인내심은 넘쳐 나도록 강하다. 이제 당신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위해 달리는 용기를 가져도 좋을 때다. 한 오라기 남기지 않고 옷을 벗었던 무대 위의 그들처럼, 열광적으로 노래하며 연주하는 그들처럼 무언가를 ‘저지른다면’ 모든 사람들은 바로 당신에게 손바닥 빨개지도록 힘찬 박수갈채를 보낼 것이다. 그날이 바로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상사가 아니라 내 이름 석 자만으로도 자랑스러운 행복이 뻥하고 터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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