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나무여도 좋다. 열매로 모두를 이롭게 할 수 있다면
작은 나무여도 좋다. 열매로 모두를 이롭게 할 수 있다면
  • 한동직 기자
  • 승인 2007.12.10 1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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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 인] 한전 배전공사업체, 대성전원설비 김종수 전공장

“사람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지만 강자에 대해 복종하는 것만 가지고 세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약자인 사람은 언제든 먹혀버리고 말테니까요. 하지만 나무는 자연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하며 세상을 향해 뿌리를 내리며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가을, 제 잎을 떨어뜨리는 바람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늘 바쁜 사람들을 좇아가는 일은 바람을 따라가는 일만큼 힘이 든다. 그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늦게 소개를 받아 시간이 초초해져서 애가 탔는데 밤에서야 전화가 닿았다.

“내일은 일원동 삼성병원 근처에서 현장 작업이 있어요.”라는 말에 일단 안도한다. 어째든 내일은 만나겠지 하는 생각에 이번에 만나게 되는 사람은 어떤 분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났다.

어제 한전의 연간 단가계약 공사업체인 대성전원설비의 소장과의 전화통화 한마디를 목적지 삼아 일원동에 도착해 몇 번이나 전화로 지역을 물어가며 찾아간 곳에는 마침 지중선 정비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전 11시경이다. 햇빛이 화창한 날, 부근의 학교에는 모두 수업 중인지 조용하고 그 햇살 아래 땀을 흘리며 선로 정비에 몰두하고 있는 그들이 모두 주인공이다. 
 
요사이 날씨가 풀려 많이 따뜻해진 때문인지 거리의 사람들도 활기가 있다. 성대 정문 앞을 지나 골목길에 접어들다가 문득 며칠 전 한 시인과의 만남에서 얘기를 나눴던 나무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나이가 오십 중반에 들어가는 그는 점점 나이를 먹으니 나무가 좋아지고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나무의 순응방식에 대해 얘기했다.

“사람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지만 강자에 대해 복종하는 것만 가지고 세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약자인 사람은 언제든 먹혀버리고 말테니까요. 하지만 나무는 자연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하며 세상을 향해 뿌리를 내리며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가을에 제 잎을 떨어뜨리는 바람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일원동 골목 한 가운데 물이 배수로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아래로 배출된다는 새로운 형태의 길을 포설하고 있는 현장에서 지중선이 물에 잠기지 않도록 선로를 정비하는 전공들을 보면서 그들의 뿌리가 나무와 같이 든든하게 세상을 받쳐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 일터에서 작업시간을 뺏는 일은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일터에 다가가 김종수 전공장을 찾았다. 전공장이라는 직함이 다소 어색했지만 예감처럼 그 직책은 현장의 업무를 관장하며 전공들에게 업무 분담을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검게 탄 얼굴이 건강해 보이는 김 전공장은 잠시 전선을 만지던 일손을 놓고 악수를 나눴다. 젊은 시절 일찍부터 전공의 일에 뛰어들어 그 일에 잔뼈가 굵은 그이지만 순순한 용모가 시선을 끌었다.

사우디서 뜨거운 땀으로 익힌 전공의 일

경남 진주가 고향인 김 전공장은 취업을 위해 일찍 상경한 사람들이 그렇듯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노인도 아닌 그가 보릿고개를 얘기하니 뜻밖이었지만 삼, 사십년 전의 일이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소작농이 많았던 그 시절 조그만 땅에서 나오는 곡식이 많지 않았던 건 당연하기 때문에 늘 먹을 것이 풍족치 않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김 전공장에게서 이미 저만큼 멀어져 있다.
82년, 선배를 따라 서울에 상경해 전기 일을 시작한 그는 처음에는 외선이 아닌 내선공사의 일을 하며 전공을 배웠다. 내선작업은 옥내배선 작업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처음 전기를 모르던 그에게는 기초를 다지는 좋은 경험이 됐다.
군 제대 후 88올림픽 후에는 현대건설의 사우디 젯다 현장에서 랩스발전소에서 전기와 식수를 공급하는 전공 일을 하게 되면서 전공 일도 많이 익숙해 졌지만 기후에 적응하느라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그렇게 사우디에서 15개월을 일한 후 90년도에 한국으로 돌아와  일거리를 찾던 그에게 친구가 인입선 교체작업을 같이 하자고 해 시작한 것이 외선공사이고 본격적인 전공으로 한전의 연간단가계약업체에서 일을 시작, 처음 입사해 일하게 된 곳이 한국전기방식(주)이다. 그곳에서 4년간을 근무했다.

그 다음에는 성은전설, 대성, 성하 등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지금의 대성전원설비로 오게 된 것이다. 계약 체계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런 문제로 인해 전공들의 이직이 많고 무엇보다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난제일 수밖에 없다.

“지금의 한전 연간 단가계약 업체에서 근무하게 된 게 벌써 13년째가 됐네요. 우리 일의 특성상으로 볼 때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하기가 어렵죠. 업무의 여건상 이동성이 잦은 게 이 가공배전업무의 특징입니다.”

김 전공장은 지금 일하고 있는 직장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김 전공장이 전기분야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때는 1982년이다. 그 후 군대를 제대한 후 처음에는 건설업체에서 사우디에 파견을 갔다가 전기공사 하도급 업체에서 90년도부터 지금의 외선공사 일을 하게 됐다.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큰 어려움은 없이 살고 있는 가장 중요한 바탕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전기 분야에 발을 들여 한길을 걷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고 이제 전공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된 것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책임을 느낍니다.”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가족은 가장 큰 힘이 된다. 항상 중장비가 동원되고 무거운 전주와 전선 등을 다루며 힘든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이다. 물론 안전을 위해 항상 최대한 노력하지만 허술한 지지대나 로프에 몸을 의지한 채 모두가 생명을 담보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임 소장은 한 번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그는 지금까지 평생을 새벽 5시 반에 일어난다. 부지런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나름의 법칙을 깨달은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숙명의 부지런함인지 모른다.

전공의 일이 3D업종이라는 얘기는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실제로 그가 일하는 현장이나 다른 공사현장 어디에도 젊은이는 보이지 않았다. 새로 충원되는 인력이 적기 때문에 신기술의 노하우를 현장에 즉시 적용하기가 쉽지 않고 인력 동원에 어려움이 크다. 이런 점이 임 소장으로서는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다.

송전선로에서 변전소를 거쳐 일반 소비자에게 오기 위해 배전 가공선로를 거치게 되는데 보편적으로 전신주를 세우고 변전소에서 넘어온 배전선로를 연결해 각 가정이나 공장, 건물 등에서 사용할 수 있게 전설해 주는 것을 배전가공공사라 말한다.
최근 도심에는 전주를 세우기 어려운 지역에 지중으로 송전선로를 매설해 도시 미관을 해치지 않고 선로를 끌어다 쓸 수 있게 되면서 전주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지금도 골목을 돌아보면 거미줄처럼 전깃줄이 얽혀있다.

김종수 전공장은 자신의 관할구역인 서울 강남권의 골목마다 모든 전주와 지중 매설 지역을 샅샅이 알고 있을 정도로 배전 가공 및 지중 공사에 있어서는 베테랑이다.
살아있는 고압을 다루기 때문에 생명과 직결돼 긴장을 늦출 수 없고 그래서 직원들과의 호흡이 가장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신입직원들과 기존의 직원들에게 정기적인 교육을 실시한다. 전에는 한전에서 일괄적으로 시행했는데 최근에는 민간에서 위탁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내가 먼저’라는 생각이 모두를 이롭게 해

“순조롭게 잘 끝나고 그날 해온 일들을 곰씹어 볼 때 아, 오늘도 무사히 내게 주어진 일을 완수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 때가 가장 보람이죠.”

모든 업무의 시작과 끝을 본인이 맡고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일을 하면서 어려운 점이 어디 한 둘일까. 남 탓하지 말고 내가 먼저 나서서 일해야만 다른 사람이 그만큼 편할 수 있다는 생각을 김 전공장은 늘 하고 있다. 요즘은 정전하지 않고 가능한 시공을 완료하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주민들은 민원제기 현실에 대해 이해 못하고 때로 마찰을 빗기도 하는데 김 전공장은 이제 그런 일도 이력이 붙어 해결하는데도 선수가 다 됐다.

또한 태풍이라도 불게 되면 정전사고가 많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전원 비상으로 팀별로 24시간 대기상태에 돌입해 대기해야만 한다. 이 일을 하며 김 전공장은 이러한 일상사에 늘 준비가 돼있다.

“IMF가 터진 후 남양주지역에 근무할 때 수해복구 하면서 한 일주일씩 안전화도 못 벗을 정도로 바빴지만 주민들이 참, 노고가 많았다고 격려해 줄때 보람을 느꼈고 지금도 많은 주민들이 격려해 주고 있어 늘 그 자부심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또한 회사도 꾸준한 사업의 성과를 거둬 가정생활도 안정적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희망입니다.”

김 전공장은 어릴 적 큰 꿈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농부의 부모를 모시며 농사를 지어 그해 먹고 살면 다행인 시절을 보내면서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구나 생각했다.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일을 시작하는 부모님을 보며 커 가면서 그런 성실성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

아직 건강에는 자신이 있다는 그는 그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이 있다면 타고난 근면성과 건강인데 잘 지켜야 한다며 그 건강의 비결은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 별 보고 출근하고 하루를 마치며 별을 보고 퇴근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일상, 힘든 일을 매일 해야 하는 그 자체가 운동이라고 여기고 있다.

김 전공장은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데 이제는 많이 커서 자기 스스로 판단할 나이가 됐기 때문에 가급적 스스로 실천하도록 하고 잔소리는 가급적 삼가고 있다.

“벌써 이 분야에서는 노장 측에 들기 때문에 노후에 대한 걱정이 없을 수 없죠. 최근에는 건설 경기 등의 불황으로 일감이 줄어들어 걱정이고 계약 단위로 일이 진행되기 때문에 늘 고용이 불안정한 것이 제겐 가장 큰 고민입니다.”

“나는 매일 아침 저 자신에게 다짐합니다. 내가 먼저 일을 준비하고 가장 나중까지 남아 마무리하며 책임을 다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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