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에 관한 의미론적 의문을 제기한다
소통에 관한 의미론적 의문을 제기한다
  • 박정필 기자
  • 승인 2007.11.19 23: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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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재발견] 바벨

아이를 잃고 실의에 빠진 아내 수잔(케이트 블란쳇 분)과 함께 모로코로 여행을 온 리처드(브레드 피트 분). 같은 아픔을 안고 있지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둘에게 이 낮선 여행이 달가울 리 없다. 서로에 대한 감정의 폭발이라는 시한폭탄을 짊어지고 억지스런 여행을 하던 부부. 그런데 어디선가 갑작스레 날아온 총알이 수잔의 어깨를 관통한다.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해야만 했기에 리처드의 두 아이들을 데리고 멕시코로 내려온 유모 아멜리아. 하지만 즐거운 결혼식이 끝나고 다시금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은 무척이나 험난하다. 끝이 안 보이는 사막의 한가운데서 아이들을 잃어버린 아멜리아는 자식 같은 두 아이들에 대한 걱정에 끝없이 오열한다.

어머니의 자살을 눈앞에서 본 청각장애 여고생 치에코. 다정한 아버지조차 채울 수 없는 빈자리와 어머니에 대한 갈망은 아직은 어린 치에코를 한순간 잘못된 상상의 길로 인도하고, 그런 치에코의 앞에 나타난 한 형사는 진심으로 그녀를 위로하려 한다.

가난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모로코의 형제 유세프와 아흐메드. 염소를 괴롭히는 자칼을 사냥하기 위해 아버지가 그들에게 맞긴 한 자루의 라이플로 사격 연습을 하던 두 형제는 한순간의 호기심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누설되어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간직한 그들, 하지만 그 비밀은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커다란 고통을 안기게 되는데…….
 

플롯의 탁월함을 넘어 범세계적 현실과 인간의 본능을 아우르다

전작 <아모레스 페로스>와 <21그램>으로 인간 본연의 삶과 죽음에 대한 오묘하면서도 깊이 있는 성찰로 일약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그는 다중스토리 중첩의 방식을 빌린 영화 <바벨>에서 하나의 사건이 점차 동심원을 넓혀가는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소한 사건이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면서 무관계한 개개인이 서로 얽혀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실로 놀랍다.

이는 단순히 플롯의 탁월함을 넘어 범세계적인 현실을 아우르는 감독의 시선과 문제제기로 이어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성경의 ‘바벨탑’ 모티브를 빌려와 인간사이의 소통에 관해 의미론적 물음을 던지는 영화 <바벨>. 그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소통을 잃고 자신만의 바벨탑에 갇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이들에게서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살아간다’라는 느낌보다 ‘죽어간다’라는 느낌이 더욱 강한 것일까? 황량한 사막에서 미지근하게 데워진 코카콜라를 마시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삶에 대한 열망도, 남아있는 두 아이에 대한 애정도 읽을 수 없다. 깊은 상처가 주는 아픔이 스스로를 닫아버리고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모로코의 아흐메드와 유세프도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잘하는 동생 유세프에게 자괴감을 가진 형 아흐메드는 동생을 질투하고 그와의 소통을 거부한다. 동생보다 훨씬 어린 형의 모습은 이 영화가 시작될 수 있었던 촉매제로써 인간이 가진 내면에 질투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치에코는 결국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이다. 엄마의 죽음과 자신의 장애가 주는 나약함 때문에 깊은 상처를 갖고 있는 그녀는 세상과 소통함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는 결국 이 영화가 인간사이의 소통의 부제에 관한 이야기임을 분명하게 해준다. 스크린 속에 비춰진 그녀의 나체는 마냥 불안하고 안쓰러웠으며, 쓸데없는 치기에 다리를 벌려 음모를 보여주는 모습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알레한드로 감독이 제시하는 타협점, 관객들과 악수를 청하다 

신이 인간의 오만함에 내린 재앙. 소통의 불협화음, 언어의 분리. 사고와 이념의 혼선이 부른 인간의 모든 갈등은 어쩌면 이 ‘의사소통의 단절’에서 파생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 <바벨>은 소통의 부재가 인간을 얼마나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한편 비열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하지만 알레한드로 감독은 이런 문제제기와 함께 타협점을 열어둔다. 치에코의 알 수 없는 아픔을 조용히 보듬어주는 형사, 그리고 당황하고 손 벌릴 데 없는 리차드를 옆에서 지켜주고 도와주는 모로코 청년이 바로 감독이 관객들에게 권하는 악수의 손내밈이다. 이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대변인들이자 ‘소통할 줄 아는’ 인물들이기에 아직 우리의 삶이 지속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입증시키는 한편, 타인의 아픔을 끌어안고 교감한다.

<바벨>을 한번 보고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영화가 수많은 인간소통에 대한 메타포를 결코 알아듣기 쉽지 않게 돌려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영화 개봉 당시 일부 관객들의 반응처럼 ‘재미없고, 난해하다’라는 평을 내릴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영화를 봐야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소통’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길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볼 기회를 준다는데 있다. 단순히 장면을 쫓아가면서 진정 <바벨>을 보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면서, 고민하면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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