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그립기만 한 설날의 추억
그때 그 시절, 그립기만 한 설날의 추억
  • EPJ
  • 승인 2015.03.12 10: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족 고유의 명절 설 풍경이 변하고 있다.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지만 따스함이 묻어나던 모습들은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편리함과 스마트함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시대다.

설 분위기가 정초 며칠간 계속되던 옛날과는 달리 요즘에는 명절증후군, 명절스트레스라 해서 가족간 모이는게 괴롭고 고민스러워 굳이 설 명절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설 대표음식인 희고 긴 가래떡을 뽑기 위해 방앗간 앞에 줄서는 것이 번거로움 뿐, 굳이 필요하면 한끼먹을 음식만 장만해서 먹으면 되는 부족함이 없는 풍요의 시대다.

이제는 몇시간을 달려 찾아오던 자식들이 안쓰러워 부모가 대신 자식들을 찾아오는 역귀향 시대가 됐고,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은 점점 사라져 갈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서울과 도심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시골고향은 아버지와 어머니 고향으로만 생각한다.

요즘의 명절 풍속도는 며칠간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가는 대신 낭만 여행길에 오르는 것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몸은 편해지고 어디든 쉽게 떠날 수 있게 됐지만 가족간의 정겨움은 더욱 그리워지는 설 연휴의 공허감이 밀려든다.

우리네 60~70년대 설날 추억을 한번 뒤돌아보면 아련해지고, 가족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아득한 추억일 듯 하다. 그때 그 시절 대표적인 귀향선물이었던 설탕세트를 사서 고향집으로 향하는 그리움의 마음에 뜬눈으로 전날밤을 보낸다. 고속버스표 예매날에는 삽시간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표가 매진되고,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던 기억이 새록새록하기만 하다.

용산역 광장에 몰려든 열차 예매객들은 마치 영화에 나오는 포로수용소를 방불케한다. 예매인파로 불야성을 이뤘던 서울역의 모습은 불과 30~40년전 우리의 설 풍속도였다.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고 텐트까지 동원된 추억의 고향행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입구앞에서 인산인해를 이뤘고, 부딪치고 밀치는 복잡함 속에서도 짜증보다는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으로 벅차기만 했던 추억의 시절이었다.

마음 한구석 눈덮인 하얀 초가지붕이 그립다. 뉘엿뉘엿 해저무는 저녁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가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우리를 기다리던 고향 어머니의 모습, 자식을 기다리며 밥짓는 모습, 당신들 배고픔은 잊은 채 멀리서 찾아올 자식의 주린배가 염려돼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고향길 열차를 탔다는 것만으로 행복했고, 자리가 없으면 선반이라도 좋았다. 사람이 아닌 짐이 되어도, 고향에만 갈수 있어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고향대문을 들어서는 기쁨과 처마 끝 거꾸로 선 고드름이 주렁주렁 반갑게 인사한다. 설이 다가오면 뻥튀기 아저씨들은 ‘뻥이요’를 우렁차게 외치며 갈고리를 잡아당긴다. 천둥치는 소리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면 광주리에서 흘러나온 옥수수와 쌀을 주워먹던 시절, 수십년이 흐른 지금은 그날이 너무도 그립기만하다.

설 차례상은 정성을 다하는 음식장만으로 근엄함마저 묻어난다. 몸과 마음으로 조상께 엄숙히 절할 때, 같은 또래 꼬마들끼리는 서로의 옷차림을 보며 킥킥거리고 웃던 기억이 떠오른다.

흥겨운 장단의 풍물패가 동네 집집을 돌 때 흥겨움에 춤추며 졸졸 뒤따르던 설날의 추억이 있었다. 점점 메마르고 삭막해져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없어도 정겹고 행복했던 그 시절을 추억해 본다.

세뱃돈을 줘야하는 나이가 된 지금, 세뱃돈을 받던 설날이 너무도 그립기만 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