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색조
팔색조
  • EPJ
  • 승인 2013.10.2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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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학카페에 정기적으로 올리는 내 영화 에세이에 아주 열심히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팔색조’라는 닉네임을 쓰는 여자였다. 지난여름, 그분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내 책 한권을 보내주겠다고 쪽지를 보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회신이 왔다. 부산이었다.

한 보름쯤 지났을까, 학술대회 준비관계로 주말 경주에 출장갈 일이 생겨서 문자를 보냈더니 놀랍게도 시간을 내주면 경주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금요일 저녁에 회의를 한 후 콘도에서 하루 밤을 자고, 토요일 오전 11시에 경주고속터미널에서 그녀를 만났다.

40대 중반쯤 됐을까? 아담한 체구에 호리호리한 몸매,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동자가 유난히 까맸다. 얼핏 소설 속의 ‘카르멘’이 떠올랐다. 돈 호세를 유혹해서 파멸에 이르게 하는….

함께 택시를 타고 요석궁에 갔다. 두어 시간 동안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눴다. 둘이서 복분자 한 병을 비웠다. 학원에서 수능준비생을 상대로 논술강의를 하면서 투잡(two job)으로 전기(傳記)를 대필하는 일을 한단다. 내가 쓰는 영화에세이에 반했다며, 오늘은 꼭 자신이 밥값을 내겠다고 했다. 경주 최고의 한식집이라 꽤 비싼데도.

현재 집필중인 ‘전기’의 주인공과 토요일 오전에 만나 내용을 조율하기 위해 한 달에 두 번 정도 금요일 밤에 상경을 한단다. 서울에서 만나고 싶다고 했다. 전에는 서울에 가면 도니샘을 만났는데, 요즘은 안 만난단다. 코드가 안 맞다나. 도니샘은 이 문학 카페에서 활동하는 시인으로, 가끔 댓글이나 문자로 연락하며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다.

요석궁을 나와서 함께 걷다가, 예매해놓은 KTX 시간에 맞춰 그녀를 보내고, 택시를 타고 신경주역으로 향했다. 서울로 오는 동안 계속 문자가 왔다.

‘중학교 때 좋아했던 선생님과 많이 닮았다.’
‘요석궁에서 마주 앉았을 때 그 무릎에 앉아보고 싶었다.’
‘옆에서 나란히 걸을 때도 내 어깨에 손을 얹어주기를 바랬다.’

나도 문자를 보냈다.
‘부산에서 고속버스 타고 출발한다고 했을 때 맘이 설렜다.’
‘대합실에서 첨 마주쳤을 때, 약간 수줍은 듯한 그 미소가 좋았다.’
‘함께 거닐며 영화얘기를 하면 잘 통할 거 같다.’

다음 주 금요일, 퇴근시간쯤에 서울에 도착할 거라는 문자가 왔다. 나는 우리 사무실이 있는 강남으로 오라고 했고, 퇴근 후 강남역에서 만났다. 먹자골목 쪽으로 함께 걷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가지러 함께 우리 사무실로 올라왔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눴다.

남편에 대해 물으니 오퍼상이란다. 그러더니 자신에게 ‘도화살’이 있는 거 같다고도 했다. 어떤 때는 ‘내가 색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단다. 가끔씩, 남편과 화끈하게 일전(?)을 벌이는데, 남편이 자신의 욕구를 다 채워주지 못한단다. 아이는 올해 대학에 입학한 아들 하나란다. 지난봄 학교 주변에 원룸을 하나 얻어주었는데, 서울에 오면 거기서 잔단다.

사무실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영화에서처럼 뜨겁게 첫 키스를 나눴다. 1층에 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지만, 어지럽다면서 한동안 내 가슴에 기대 있었다. 칵테일 바에 들어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얘기를 나누었다. 밤늦게,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나도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문자를 받았다. ‘어젯밤 샘을 생각하며 남편과 찐하게 했어요.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사무실에 도착하니 서정주 시인의 ‘웅계(雄鷄)’를 옮겨 쓴 메일이 와있었다.

어찌하야 나는 사랑하는 자의 피가 먹고 싶습니까.
“雲母石棺(운모석관)속에 막다아레에나!”
닭의 벼슬은 心臟(심장)우에 피인 꽃이라 구름이 왼통 젖어 흐르나
막다아레에나의 薔薇(장미) 꽃다발.
傲慢(오만)히 휘둘러본 닭아 네 눈에 創生(창생) 初年(초년)의 林檎(림금)이 瀟酒(소주)한가.

임우 다다른 이 絶頂(절정)에서 사랑이 어떻게 兩立(양립)하느냐
해바래기 줄거리로 十字架(십자가)를 엮어 죽이리로다. 고요히 침묵하는 내 닭을 죽여…
카인의 새빩안 囚衣(수의)를 입고 내 이제 호을로 열손까락이 오도도 떤다.
愛鷄(애계)의生肝(생간)으로 매워오는 頭蓋骨(두개골)에 맨드램이 만한 벼슬이 하나 그윽히 솟아올라…

이 시를 읽고 적잖이 당황했다. ‘웅계’는 수탉의 행태를 빌어 인간의 섹스를 절묘하게 표현한 시가 아닌가. ‘웅계’는 상(上)과 하(下)가 있는데, 하필 메시지가 더 강한 하편이었다. 왜 이런 야한 시를 적어 보냈을까?

일주일 후 금요일, 오늘은 좀 늦게 올라간다며 서울역으로 와달라는 문자가 왔다. 사무실에서 좀 늦게 나와 도착시간에 맞춰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문자가 왔다. 둘만의 오붓한 공간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싶단다. 노래도 부르고 싶단다.

역에서 만나 함께 걸었다. 24시간 영업하는 노래주점에 들어가 별실에 자리를 잡았다. 맥주와 안주를 시켰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내 품에 안기며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더니 내 귀에 대고 ‘사랑해’하고 속삭였다. 노래를 몇 곡 부르고 나서 내가 ‘누드 보고 싶다.’고 했더니, ‘여기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 어디에서…?
그때 내 핸드폰에서 문자 오는 소리가 났다. 도니샘이었다. 장문의 문자가 두 개나 와있었다.
‘샘이 올리는 글에 팔색조가 댓글을 다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파심에서 문자를 보냅니다. 오늘 저녁에 그녀가 상경하는 거 알고 있어요.’

‘혹시 팔색조 만나거든 조심하세요. 물불 안 가려요. 금요일만 되면 올라와서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내 모텔가자고 하니…. 우리 카페에서 몇 사람이 당했어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옷매무새를 고쳐 앉으면서 황급히 둘러댔다.
“와이프 문자예요. 나갑시다. 장인장모님이 올라오셨다고 빨리 집으로 오라네요.”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신문’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 꾸는 개똥벌레’ ‘삼국지 인물 108인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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