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졸한 변명인가? 반전의 수작인가? <반딧불의 묘>
치졸한 변명인가? 반전의 수작인가? <반딧불의 묘>
  • 박정필 기자
  • 승인 2007.09.03 1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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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재발견] 반딧불의 묘

“소화(昭和) 20년(1945년) 9월 21일 밤, 나는 죽었다.”

서서히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소년의 영혼이 낮은 독백을 중얼거린다. 소년의 이름은 세이타. 시체 옆에 떨어져 있는 사탕상자에는 한 달 전 세이타와 똑같이 죽어갔던 여동생 세츠코의 뼈가 들어있다.

3개월 전, 고베에 떨어진 미군의 폭격기 B-29의 대공습. 그간의 단란했던 생활을 뒤로하고 여동생 세츠코와 함께 서둘러 대피하는 세이타. 다행이 두 남매는 화염을 피하나 어머니는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결국 숨을 거둔다.

해군장교로 전쟁터에 있는 아버지의 생사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집이 불타고 어머니까지 잃은 두 남매는 먼 친척뻘 되는 아주머니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남매는 식량만 축내는 불청객 신세로 냉대를 받고 결국 마을 근처의 어두운 방공호 속에서 둘만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처럼 패전 직전 일본의 모습을 전쟁을 통해 고아가 된 남매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하며 전쟁으로 인한 황폐와 비인간성을 묘사한 영화 <반딧불의 묘>는 미아자키 하야오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감독인 다카하타 이사오의 대표작으로, 88년 개봉 이래 계속적으로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키며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영화가 지닌 가치에도 불구하고 20년 가까이 우리나라에서만은 극장에 걸리지 못한 작품이기도 하다.

 

편협한 ‘상대적 리얼리티’의 난장, 치졸한 자기 위안과 변명
그 이유는 우범국인 일본을 마치 피해자인양 표현했기 때문이다. 민족감정을 배제한 체 객관적으로 저울질 하더라도 분명히 그런 부분이 없지 않다. 남매의 머릿속에 그들의 아버지는 믿음직한 ‘대 일본제국의 충성스런 해군장교’로 이미지화 되어있고, 영화 속 어디에도 자국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어리석음과 반성이 물리적인 형태로 비춰지지는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 세이타의 “대일본 제국이 망했단 말입니까?”라는 울부짖음과 친척 아주머니의 나라에 봉사하라는 대사 등을 비춰 유추해보면 등장인물들은 스스로가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군국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인다.

감독은 이런 지적들에 대해서 “리얼리티에 중점을 뒀다”라는 말로 일축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편협한 ‘상대적 리얼리티’인가. 마치 어떤 살인자가 자신이 죽인 이의 유가족들에게 스스로의 힘든 감옥생활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보여주며 “나도 이만큼이나 힘들었다”라고 자위하는 꼴이지 않는가. 적어도 그네들이 일으킨 전쟁에 신음했던 우리네들에게 그가 말하는 ‘리얼리티’란 그들 스스로의 죄의식을 덜어내기 위한 치졸한 자기 위안으로 비춰질 뿐이다.

이처럼 어떤 부분에서 <반딧불의 묘>는 가증스럽기 이를 데 없는 작품일 수도 있다.

 

<반딧불의 묘>, 애니메이션 역사의 큰 획을 긋는 수작
하지만 이런 정치적인 이해관계나 과거사적인 문제를 배제하고 작품 자체로만 판단한 <반딧불의 묘>는 말 그대로의 수작이다.

그 힘은 우선 남매의 캐릭터에서부터 시작된다. 전쟁이 남긴 황폐함과 빈곤, 자신들만 남겨졌다는 무거운 책임감과 외로움 속에서도 쉽게 좌절하지 않고 동생을 잘 보살피는 세이타, 그리고 그런 오빠를 잘 따르며 동심을 잃지 않는 모습이 귀여운 세츠코. 영화는 순진무구한 남매의 동선을 따라가며 그들이 희망을 잃고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일본영화 특유의 관조적인 시선으로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관조적 연출력에 힘입어 관객들은 그들의 모습에 자연스레 감정을 이입하게 되고 동정어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는 슬픔을 표현하는 연출력이다. 단언하건데, 애니메이션 역사상 이 작품만큼 사람 마음을 확실히 쥐어짜는 영화는 없었다. 심지어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너무 슬퍼서 절대로 다시 안보겠다고 할 정도니까 말이다. 어쩌면 이 영화가 군국주의의 잔재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이 영화가 표현해 내는 특유의 슬픈 감성에 똑같이 눈물을 흘렸기에 그런 자극에 흔들려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영화는 담담하면서도 효과적으로 남매를 보여주며 슬픔을 자극한다. 세이타과 세츠코가 보여주는 잔잔하지만 잔인한 이 드라마는 분명히 과거사를 뛰어넘어 마음을 울리는 한편의 서정시로써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적 수작, 꼭 한번 보고 느껴라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반딧불의 묘>는 일본 군국주의의 치졸한 변명일까, 전쟁의 아픔을 그린 반전의 수작일까? 그 판단은 관객들 각자의 몫일 것이며 <반딧불의 묘>는 관객들의 머릿속에 작품이 완전히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이런 트라우마를 안고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판단을 하던 이 문제적 수작을 꼭 한번 경험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결코 쓸데없는 영화에 시간 낭비했다고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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