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호 할머니
503호 할머니
  • EPJ
  • 승인 2013.09.17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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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콩트마당(61)

“야 야, 새댁아~ 이거 좀 봐 도고.”

그 할머니가 관리실에 들어와 새댁을 찾는 것을 보고 또다시 월말이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내가 일하는 곳은 200가구가 좀 넘는 아파트 단지의 관리실이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는데, 유독 한 사람만 나를 ‘새댁’이라 부른다. 바로 102동 503호 할머니다.

매달 각종 공과금 고지서를 넣은 이상하게 생긴 주머니를 무슨 보물단지처럼 들고 관리실로 찾아와 나를 ‘새댁’이라 부르며 내 속을 뒤집어 놓는 것이다. 와서 하는 얘기도 매번 똑같다. 고지서를 책상위에 쭉 펼쳐놓고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는 내게 말을 건다.

“새댁아, 마이 바뿌나~ 뭣이 그래 바뿌노? 그래도 내꺼부터 좀 봐도고. 이거는 관리비고, 이거는 도시가스, 이거는 전화요금, 또 이거는 재산세 같은데 맞제? 이거 다 합쳐서 얼마를 내야 되노?”

그 할머니는 꼭 바쁜 월말에 와서 성가시게 한다. 나는 꾹 참고 이것저것 합쳐서 총 얼마인데 은행에 가서 내면 된다고 자세히 설명을 하고, 종이에다 큼지막한 글씨로 적어드린다. 그러면 할머니는 다시 고지서를 주섬주섬 챙겨 주머니에 넣고는 옆자리 경비원 아저씨들이 앉는 의자에 턱 걸터앉는다.

그리고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삐뚤삐뚤한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있는 수첩을 꺼내 내밀면서 “거기에 박갱수 있제? 박갱수라고 있을 끼다! 그 번호 찾아서 전화 좀 걸어도고”하며 또 성가시게 한다. 건네받은 수첩이 너덜너덜하다. 할머니 얼굴의 주름살만큼이나 세월의 질곡이 느껴진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8년쯤 되던 2년 전, 맞선을 보고 교제하던 사람과 결혼이 거의 성사단계에 이르러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에 왔는데 혼사(婚事)가 깨지고 말았다. 그래서 좀 쉬다가 작년 말 30대 중반의 나이에 집과 가까운 이 아파트 관리실에 다시 취직을 한 것이다.

속에서 슬슬 부아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몇 달 전에 비올 때 빌려간 우산을 아직까지 안 가져온 것까지도 생각이 났다. 그러나 입주자 대표님이 관리실에 오시면 늘 강조하는 것이 친절이 아니던가. 첫째도 친절, 둘째도 친절, 셋째도 친절. 나는 부아를 꾹 참고 박경수를 찾아 내 책상 위에 있는 전화로 번호까지 눌러서 수화기를 할머니에게 건넨다.

“갱수가? 내다. 니 어데고? 밥은 뭇나?”

이렇게 시작되는 통화는 짧으면 5분, 길면 10분을 넘어선다. 박경수는 포항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는 할머니의 외아들 이름이다. 할머니는 평소엔 포항에서 전세를 살고 있는 아들집에서 지내다가 매월 20일이 넘으면 이곳으로 오는 모양이다. 입버릇처럼 이곳에 있는 아파트만 팔리면 아들이 있는 포항으로 갈 것이라며 아들 자랑을 빼놓지 않으니….

할머니의 전화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친구나 친척 등 두세 통쯤 더 이어진다. 통화가 끝나면 대뜸 “새댁아, 지금 몇 시고? 점심시간 다 됐제?”하면서 노인정에 공짜 밥 먹으러 가야 된다며 수첩과 주머니를 챙기고는 “내 간다. 일 봐래이~.”하고는 잰 걸음으로 관리실을 나선다.

할머니는 지독한 구두쇠다. 전화는 관리실에서, 빨래는 관리실 옆 화장실에서, 식사는 노인정 아니면 자주 가는 절에서 해결한다. 그러니 할머니가 매월 이곳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단돈 100원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리비가 비싸다고 늘 푸념이다. 102동 503호는 비어있는 날이 많아서 관리비가 아주 적게 나오는 데도 말이다.

할머니가 가고나자 할머니의 집안사정을 잘 아는 관리소장님이 할머니의 과거사와 근황을 들려주었다. 할머니는 서른 살을 갓 넘겨, 당시로서는 노처녀 취급을 받던 시절 딸 셋이 딸린 상처(喪妻)한 중년아저씨한테 시집을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바로 포항에 있는 그 아들이란다. 지금 마흔이 다되어갈 텐데, 아직 결혼을 못 시켜서 걱정이란다.

하나 뿐인 아들을 애지중지하던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이 아파트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등기까지 해주었는데, 이를 알게 된 딸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아파트를 팔아서 n분의 1씩 나눠야 한다며 한바탕 소란을 피웠단다. 할머니는 이 아파트를 팔아서 포항에 있는 아들에게 조그만 아파트를 사줄 생각을 하고 있는데, 팔리면 딸들이 또 몰려와 자신들의 몫을 달라고 할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한 달쯤 지났을까? 아침에 좀 일찍 출근해서 관리실 청소를 하려고 보니 빗자루가 안 보인다. 엊저녁에 관리실 바닥을 닦고 나서 씻어 널어놓은 대걸레도 안 보이고. 간혹 관리실 옆 화장실에 새로 갖다 놓은 비누가 없어질 때는 있었지만 빗자루와 대걸레가 없어진 것은 처음이다. 요즘 세상에 이런 것을 훔쳐가다니….

빗자루와 대걸레 때문에 아침부터 짜증이 나있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관리소장님께 보고를 하고 다시 사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불현듯 102동 503호 할머니 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런 물증은 없지만. 그때 관리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 할머니였다.

“내다, 503호 할매! 그동안 내가 실수를 했제? 경비원 아저씨가 카던대, 새댁이 아니고 아직 시집을 안간 처자라 카데. 그 소리 듣고 어제 우리 아들보고 오라캤다 아이가. 내가 관리실 옆에 있는 빗자루하고 대걸레 좀 갔다 썼는데 우리 아들이 지금 갖다 주러 갔대이. 니 함 보래이. 보기는 그래도 심성은 착하대이. 나는 처자를 고마 내 며느리로 삼고 싶대이~.”

그리고는 뚝 끊는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30대 후반쯤 돼 보이는 남자가 머쓱한 표정으로 빗자루와 대걸레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저~ 503호 할머니라고 하면 안다면서 여기 갖다 주라던데요.’하는 것이 아닌가.

포항에 산다는 그 아들이었다. 훤칠해 보이는 외모에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나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아. 예~ 거, 거기다 놓아두시면 되, 됩니다.”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신문’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 꾸는 개똥벌레’ ‘삼국지 인물 108인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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