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섬진강의 안온함을 품은 하동에 가다
지리산과 섬진강의 안온함을 품은 하동에 가다
  • 박정필 기자
  • 승인 2007.09.03 1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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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소 가는 길] 남부발전(주) 하동화력본부

갈 길이 멀다. 이번 달은 하동이다. 그간 <발전소 가는 길> 중에서 가장 먼 거리인 것 같다. 하지만 쭉 뻗은 통영/대전간고속도로를 타고 내달리는 기분은 가볍다.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면 그만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섬진강과 평사리의 전경, 청학동과 삼성궁,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는 최참판댁으로 유명한 하동. 서둘러 가도 어차피 먼 길, 마음을 비우고 하동이 보여줄 멋진 모습들을 기대해보니 마음은 이미 저만치 하동에 도착해 있다.

 

최치원 선생의 숨결과 부처님의 자비가 만나는 대사찰, 쌍계사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聖德王) 21년(722)에 대비(大悲) 및 삼법(三法) 두 화상이 “지리산(智異山) 곡설리(谷雪里) 갈화처(葛花處)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범의 인도를 받아 이곳에 절을 지어 옥천사(玉泉寺)라고 한데서부터 유래됐다고 한다.

이후 문성왕 2년(840) 진감선사가 중창해 대가람을 이뤘으며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크게 소실됐으나 인조 10년 벽암 스님에 의해 중건(이후에도 법훈·만허·용담스님에 의해 중창됐다)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서부 경남 일원의 사찰을 총람하는 조계종의 25개 본사 사찰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입구에는 나무장승과 큰 바위 두 개가 방문자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살펴보니 각각 쌍계(雙溪)와 석문(石門)이라 새겨져 있다. 이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 끝으로 쓴 글씨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어 흥미를 끈다.

‘삼신산 쌍계사’라는 현액이 걸려 있는 화려한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문수·보현을 모신 맞배집 천왕문이 나온다. 좀 더 안으로 들어서니 팔영루를 돌아 대웅전 앞에 설수 있었다. 일주문, 천왕문, 팔영루, 대웅전, 삼성각 등의 건물들은 모두 일직선에 가깝게 배치돼 있으나 산비탈을 이용한 낮은 층단이 계속되고, 또한 중간 중간에 다른 건물들이 비대칭적으로 들어서 있어 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깊숙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줬다.

한편 대웅전 옆으로 한적히 자리 잡고 있는 부도비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진감선사 부도비(국보 제 47호)다. 이 부도비는 최치원 선생이 직접 글을 쓰고 새겼기 때문에 문장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대웅전 오른쪽 명부전 앞 큰 바위의 마애불은 바위의 한 면을 사각으로 움푹 파내고 그 안에 여래형의 조상을 두껍게 양각한 것으로 감실 안에 불상을 앉힌 것 같아 신기했다.

쌍계사를 둘러보고 불일폭포에 올랐다. 지리산 10경 중 하나라는 불일폭포는 쌍계사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쌍계사와 연계한 좋은 등산코스로 이름이 높다고 한다. 높이 60m, 폭 3m의 자연 거폭에서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등산하느라 등에 맺힌 땀방울을 적잖이 식혀줬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장엄한 물줄기 앞에 풍덩 뛰어들어 아이처럼 물장구 치고 싶은 기분이 절로 들었다.

 

경상도 사투리 한 토막, 전라도 민요 한 자락이 정겨운 그 곳, 화계장터

조목조목 볼 것도 많고 느낄 것도 많은 쌍계사를 뒤로 하고 가수 조영남의 노래로 더 잘 알려진 화계장터로 가려하니 우리 앞에 장터까지 6km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만만찮은 거리지만 생각보다 날이 덥지 않아 그냥 걷고 싶은 맘에 차를 남겨두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쌍계사의 넉넉한 운치에 아직 젖어있는 것일까. 괜스레 길가에 핀 꽃 한 송이, 산들 바람에도 말을 걸어본다. 대답은 없지만 기분은 괜찮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 중 하나로 전국의 보부상, 경상·전라도민들의 집합소로 전국 어느 시장보다 많은 사람이 붐볐다던 화계장터.

직접 찾은 그곳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조금은 시끌벅적한 난장을 기대했는데 마냥 조용하고 호객을 하는 사람들도 드물다. 장터 구석에 자리 잡은 대장간의 망치질 소리조차도 고요하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조용하다고 해서 이곳이 매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도 옛 시골 장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화계장터는 오랜 역사를 지닌 장터 곳곳, 헤진 벽 사이로 그네들의 사연이 새어나오는 듯 했다. 경상도 사투리 한 토막, 전라도 민요 한 자락이 우리네 할머니 몸배바지에 밴 흙냄새처럼 정겹게 느껴진다.

그 정겨움 그대로 장터 안에 있는 재첩국집에 들어섰다.

섬진강이 품은 재첩은 예부터 유명했다. 간장병, 황달 등에 좋고 쇠약한 사람을 보호하며, 비타민B와 베타인 등 아미노산이 풍부하고 간 기능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숙취해소에 특효라는 재첩국.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나니 속이 든든한 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하다.
부른 배를 달래려 한참을 앉아있는 우리 일행에게 닦달하는 눈빛 한번 보내지 않는 주인아주머니의 여유로움에 부른 배처럼 마음도 한껏 부르다.

 

<토지>의 배경이 된 그 곳, 평사리와 최참판댁

지리산의 거대 능선이 남으로 가지를 친 성제봉 아래의 넓은 평야지대. 그 곳은 섬진강이 주는 혜택을 한 몸에 받은 악양 평사리가 있다. 중국의 악양 지방과 닮았다해 이름 붙여진 이곳이 바로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유명한 ‘무딤이 들’, 그 평사리다.

그저 논으로 둘러싸인 평야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사계절 모두 그 계절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풍취를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사진애호가들의 출사가 끊이지 않는 이곳. 과연 어디다 카메라를 들이밀어도 만족할만한 그림이 나온다. 기대했던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평사리의 호젓함을 가슴에 품고, 최참판댁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앞서 말한 <토지>의 대표적인 배경이 된 곳으로 한옥 14동으로 구현돼 있으며 조선후기 우리민족의 생활모습을 담은 초가집, 유물 등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도 조성돼 있다.

안내에 따르면 매년 가을이면 전국문인들의 문학축제인 토지문학제가 개최된다고 하는데 이로써 하동은 이곳을 대표적인 문학마을로 자리매김 시킬 전망이며 또한 소설속의 두 주인공을 캐릭터로 개발해 관광 상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예(禮)로 가르치는 학(學)의 마을 청학동과 환인·환웅·단군을 모시는 삼성궁

한편,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하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청학동이다.

어딜 가나 댕기 땋은 동자들이 명심보감을 읽고 있을 것만 같은 이곳은 하동군 해발 800m 지리산 중턱에 위치해 있으며, 삼신봉 남쪽자락으로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지리산 마을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거하던 곳이다.

전설로는 청학이 많이 노닐던 곳이라는데 뒤편으로 높으면서도 안온하게 오른 산세와 앞으로 유려하게 펼쳐진 물줄기가 과연 남다르다.

이곳 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흰 한복 차림에 머리를 땋고 상투를 틀어 우리네 옛 생활을 재연하고 있다. 한학과 예절을 가르치고 배우며 속세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이곳. 아니다 다를까. 서당의 글 읽는 소리가 무척이나 낭랑했다.

청학동 산길을 돌아 1.5km 가량 걸으니 삼성궁이 보인다. 이곳의 정확한 명칭은 외우기도 힘든 ‘지리산청학선원배달성전삼성궁’으로 이 고장 출신의 강민주(한풀선사)가 1983년에 고조선 시대의 소도를 복원, 민족의 선조인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곳이다.

‘명칭에 너무 힘을 줬다’라며 살짝 코웃음을 치는 내 눈에 펼쳐진 삼성궁은 무척이나 잘 정돈되고 규모 있는 공원이라는 느낌이었다.

특히 높게 쌓인 돌무더기와 돌담, 그리고 태극문양으로 꾸민 호수가 무척이나 운치 있었다. 이곳은 민족의 선조를 모신 곳답게 전통도맥인 선도를 지키고 신선도를 수행하는 민족의 도장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는 말을 귀엣 너머로 들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화개십리 벚꽃 길

돌아오는 길,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중 하나라는 화개십리 벚꽃 길로 차를 몰았다.

벚꽃 철이 아니라 봄의 꽃이 주는 운치를 느낄 수는 없었지만 도로 옆으로 길게 늘어선 나무들의 푸르름만으로도 일부러 돌아올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렇게 하동을 떠나오면서 이미 하동을 사랑하게 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 대한민국. 참 가 볼만한 곳도 많고, 먹을 것도 많은 아름다운 나라구나‘라는 감흥. 매번 느끼지만, 다시 한 번 가슴깊이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멋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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