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길들이기
신입사원 길들이기
  • EPJ
  • 승인 2013.06.10 13: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용현의 꽁트마당(58)

OO생명보험회사에 입사하여 어제까지 일주일간의 신입사원 교육을 마친 강철수 씨는 오늘 아침에 계약과로 발령을 받고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기획실이나 홍보실 같은 데를 좋은 곳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부서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데리러 온 계약과장을 따라 계약과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그의 실망은 곧 기쁨으로 바뀌었다. 그 사무실에는 온통 여사원들로 가득 차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한 직장생활을 이런 꽃밭에서 하게 되었으니 총각인 그로서는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약과는 과원(課員)이 모두 40명이 넘는 대식구이지만 남자라곤 계약과장과 대리 한 명을 포함해서 여섯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여사원들이었다.

전국에서 생활설계사들이 받아온 보험청약서를 모아 심사(審査)하는 것이 계약과의 주 업무이다. 즉 보험가입자가 청약서의 고지의무 란에 기록한 직업과 그에 따른 위험정도, 가입한도액 초과여부, 병력(病歷), 계약자와 만기 시 수익자와의 관계 등을 심사하는, 비교적 단순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그는 선배 남자사원의 안내로 각 파트를 돌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약과 여사원 중에서 제일 고참 ‘방 언니’에게 인사를 했다.

입사한 지 15년이 넘었고, 나이도 서른여섯 살이라니 그 보다도 여덟 살이 더 많았다. 여사원들이 계약과장이나 대리가 지시하는 일은 때로 요령을 피울 때가 있어도 방 언니가 시키는 일은 만사를 제쳐놓고 먼저 할 정도로 잘 따르고 또 무서워한단다.

그 언니는 사무실 끝 가장자리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잘 띄지 않으면서 과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야말로 명당자리에 앉아있었다. 약간 뚱뚱한 체격에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깐깐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서 ‘강철수입니다. 잘 부탁합니다.’고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방은희예요. 그런데 신고는 언제 하실 거예요?”
“신고요?”

신고란 말을 듣고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방 언니는 싱긋 웃으며 ‘군대 안 갔다 오셨어요? 신고도 모르세요?’ 하고 반문했다. 육군 병장으로 제대한 그가 신고를 모를 리 없었다. 설마 군에서 하는 그런 딱딱한 신고를 하라는 건 아닐 테고, 남자들끼리 술 마실 때 하는 폭탄주 신고를 하라는 것도 아닐 것 같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바로 앞자리에 마주앉은 선배 남자사원에게 ‘신고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요즘 신고가 어디 있어요? 안 해도 돼요. 정 하시려면 남자들끼리 점심이나 같이 한 번 하든지. 여사원들에겐 안 해도 돼요. 숫자가 너무 많아서 할 수도 없어요.”

다음날, 그는 남자사원들에게 점심을 샀다. 그리고 여사원들에게 안 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왠지 꺼림칙해서 옆자리 여사원에게 물어보았다.

“귤을 한 박스 사서 돌리든지, 하다못해 자판기 커피라도 뽑아서 한 잔씩 돌리셔야지. 남자사원들에게만 점심을 산 걸 알면 아마 방 언니가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방 언니가 가만있지 않는다는 말이 왠지 우스웠다. 그러나 커피 돌리는 건 좀 그렇다 싶고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내심 고민스러웠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계약과장과 대리가 간부회의에 참석하러 5층 강당으로 올라갔다. 간부들이 없으니 사무실이 좀 떠들썩했다. 그때 잠시 자리를 떴던 바로 옆자리 여사원이 저쪽에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장난 끼가 갑자기 고개를 내밀었다. 그 여사원이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의자를 살짝 뒤로 뺐다. 그것도 모르고 자리에 앉던 여사원이 그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 때문에 갑자기 사무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주위에서 여사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나 그 여사원은 그를 한번 힐끗 노려보더니 책상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아, 이 노릇을 어찌하랴. 새까만 신입사원이 선배 여사원을 욕보이고 울렸으니. 갑자기 식은땀이 났다. 그가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데 그 앞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그 소리가 마치 구세주라도 되는 듯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계약과 강철숩니다.”
“강철수 씨, 저예요.”
“……….”
“저예요. 저 모르시겠어요?”

수화기 저편에서 젊은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들어보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누구시죠?”

당황하는 그와는 달리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얄밉도록 차분했다.
“아니, 저를 모른다는 말씀인가요? 제가 누군지 정말 모르시겠어요?”

그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올 여자는 없었다. 친한 남자친구들한테도 아직 회사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는데….

“누구세요? 이름을 밝히셔야죠.”

그는 진땀을 흘리며 사정조로 말했다. 그냥 끊어버리자니 그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킥킥거리는 여사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순간이 그에게는 마치 몇 시간이나 되는 듯 했다. 그가 쩔쩔 매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수화기에서 그 여자의 음성이 이어졌다.

“강철수 씨, 정말 모르시겠어요? 뒤를 돌아보세요.”

뒤를 돌아보았다. 사무실 저 끝에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야릇하게 웃고 있는 방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주위 여사원들이 모두 까르르 웃었다. 거의 사색이 되어 엉거주춤 들고 있는 수화기에서 방 언니의 목소리가 다시 낭랑하게 들려왔다.

“강철수 씨, 신입사원 교육받을 때 선배사원에게 그런 장난 하라고 가르치던가요? 그리고, 남자사원들에게만 신고를 하고 여사원들에게는 신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신문’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 꾸는 개똥벌레’ ‘삼국지 인물 108인전’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