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샐러리맨의 초상
어느 샐러리맨의 초상
  • EPJ
  • 승인 2013.04.1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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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마당(56)

군에서 제대한 후 수십 대 일의 공채시험 관문을 뚫고 OO보험회사에 입사한 이래, 11년 동안 줄곧 영업국에서 근무해온 장판호 씨가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지난 달 본사로 옮겨 오고서부터였다.

입사할 당시 함께 상고를 나온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을 뿐 아니라, 그 또한 국내 굴지의 보험회사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었다. 영업국 근무발령을 받아 첫발을 내디딘 이후 줄곧 보험료 수납업무를 맡아왔었다. 3년 전 입사 8년 만에 3급 갑으로 진급, 영업국의 수납관리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가 지난달에 본사로 오게 된 것이었다.

본사로 들어가는 것은 영전이라며 다들 한 턱 내라고 아우성을 쳤건만 막상 본사에 오고 보니 평사원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영업국의 과장은 2급 을도 있고 3급 갑도 있는데 2급 을은 본사에 오면 대리가 되고, 3급 갑은 그냥 평사원이 되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과장이 하루아침에 평사원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그도 본사에서 실시하는 대리승진시험에 응시를 했으나 2년째 낙방을 하고 말았다.

장판호 씨가 본사에 오고부터 가끔 장 과장을 찾는 전화가 왔다. 그런데 우리 부엔 진짜(?) 장 과장이 한사람 있어서 자꾸만 그리로 전화가 가고, 자신은 졸지에 직급을 사칭한 꼴이 되고 말았다. 더러는 장 과장이 웃으며 전화를 바꿔주기도 하지만 도무지 미안하고 쑥스러운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사정을 잘 모르는 영업국 직원들이나 친구들이 그를 찾을 때 계속 장 과장으로 부르는 것이 문제였다.

“야, 너 어떻게 된 거냐? 요금보전부 장 과장을 찾았더니 딴사람이 나오더라. 그리고 너, 과장이 아니냐?”

가끔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친구가 있어 아주 곤혹스러웠다. 그것을 해명하다 보니 전화 노이로제에 걸릴 판이었다.

장판호 씨 하면 영업국에 있을 때부터 계산이 빠르고 정확하기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의 별명 ‘컴퓨터’가 말해주듯이 월말 마감 때마다 전자계산기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통계자료를 작성해냈다.

사실 그가 본사에 오게 된 것도 요금보전부장이 일부러 스카우트한 때문이었다. 그 후 요금보전부의 주요한 통계자료는 모두 그에게 맡겨졌고 그가 올린 자료는 검산(檢算)이 필요 없다는 불문율이 있을 정도로 정확했다.

본사에 오고 그럭저럭 한 달이 되어 처음으로 월말 수납마감서류를 올렸다. 그런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그가 작성한 수납통계서류 중에서 숫자하나가 잘못 기입되는 바람에, 회사 설립자인 명예회장까지 참석한 부서장회의에서 요금보전부장이 망신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날 부장의 노여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통계서류를 책상 위로 팽개치며 ‘컴퓨터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오산(誤算)을 할 수 있느냐?’며 길길이 뛰었다. 앞으로 이틀 동안에 다시 정확하게 작성하여 모레 아침 출근과 동시에 시말서와 함께 제출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장판호 씨가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만 둘 때 그만두더라도 이 일은 깨끗이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날 밤 혼자 사무실에 남아서 30페이지가 넘는 통계자료를 다시 하나하나 검산했다.

밤 12시가 다 되어갈 무렵, 71자에서 7자를 빼먹고 1자로 잘못 쓴 곳을 찾아냈다. 그 잘못 쓴 숫자의 단위가 억 단위여서 71억 원이 1억 원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숫자 하나가 틀리는 바람에 가로, 세로, 합계, 총계는 물론 그 뒤의 모든 통계가 줄줄이 엉터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날은 틀린 곳만 찾아내고 퇴근했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가 넘어 있었다. 그는 밤늦게까지 기다리고 있던 아내에게 본사에 오고부터 그간에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서류를 다시 깨끗이 마무리해주고 사직서를 내겠다고. 좀 쉬었다가 퇴직금으로 장사를 하리라고. 까짓 배추장사를 하더라도 이보다는 나을 거라고….

그가 본사에 오고부터 여러 가지 갈등을 겪는 것을 보아온지라 아내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나중에는 오히려 그를 격려해주었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이제 애들도 컸으니, 당신이 장사를 한다면 나도 도울 수 있을 거예요. 11년 동안이나 죽도록 일하고도 평사원이 뭐예요. 아무리 고졸이지만….”

이튿날, 출근할 때 담요 한 장을 가방에 넣어갔다. 일과시간에는 난방을 해주지만 퇴근시간 후에는 난방을 꺼버리기 때문에 야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어젯밤에는 초겨울 추위 때문에 몹시 떨었었다.

그날 밤 혼자 남아서 시말서 대신 사직서를 써서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갖고 온 담요를 뒤집어쓰고 통계서류를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다.

밤 11시쯤 되었을까, 점퍼차림의 노인 한 분이 사무실에 들어와 왜 아직 퇴근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경비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일을 좀 더하고 퇴근하겠다고 하자, 노인이 그의 직책과 이름을 물었다.

12시쯤 일을 모두 끝내고 퇴근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서류와 함께 사직서를 내야지. 몸은 피로했지만, 결심을 굳히고 나니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그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어젯밤에 새로 작성한 서류를 부장에게 올렸다. 부장이 그 서류를 들고 부서장회의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다시 사직서를 부장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부장이 회의에서 돌아올 때까지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10시가 넘어서야 부장이 돌아왔다. 부장은 자리에 오자마자, 그가 말도 꺼내기 전에, 부원들에게 잠시 주목하라며 그를 앞으로 나오게 했다.

“어제 밤늦게 창업주이신 명예회장님께서 퇴근하시다가 우리 부의 장판호 씨가 혼자 담요를 뒤집어쓰고 일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큰 감명을 받았답니다. 오늘 날짜로 특별 승진시키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자, 우리 모두 박수로 승진을 축하합시다.”

부원들의 열렬한 박수 속에, 부장은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그의 손을 힘 있게 잡으며 말했다.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았소. 축하합니다. 장 대리.”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신문’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 꾸는 개똥벌레’ ‘삼국지 인물 108인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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