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일들
알 수 없는 일들
  • EPJ
  • 승인 2013.03.1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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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

영업부에 근무하는 입사동기 기범한테서 전화를 받은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기범이가 외출했다가 들어오다가 1층 로비에서 사람을 찾고 있는 여자를 만났단다. 찾는 사람이 나와 비슷해서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단다.

“키가 175센티쯤 되고, 거무스름한 얼굴에 금테안경을 썼고, 나이는 스물일곱이나 여덟쯤, 그런 사람 이 건물에 너밖에 더 있냐?”

어떻게 생긴 여자더냐고 물었더니, 보통 키에 얼굴은 좀 갸름했고 아래위로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아주 세련되어 보이더란다. 전화가 올 거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회사로 날 찾아올 여자는 없는데…. 5시쯤 전화가 왔다.

“저, 선주예요. 김선주. 모르시겠어요? 지난번에 그 건물 1층에서 전시회가 열렸을 때 접수대에 앉아있던….”

서너 달 전에 1층 로비에서 전시회가 열렸었다. 토요일 퇴근길에 보러갔던 기억이 났다.

“아, 예. 그 미술 전시회는 가봤는데요. 그런데 아가씨는 기억이 잘….”
“몇 시에 퇴근하세요? 퇴근하실 때 꼭 만나 뵈었으면 해요.”
“예, 6시쯤.”
“그러면 그 건물 옆에 있는 OO커피숍 아시죠? 전에 약속했던…. 거기서 기다릴게요.”

대답할 사이도 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전시회 때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다른 기억이 없었다. 퇴근길에 그 커피숍을 찾아갔다. 구석자리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자가 있었다. 모르는 여자였다. 얼굴이 유난히 희고 쌍꺼풀진 눈이 매력적이었다. 내가 다가서자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김선주 씨?”

그 여자가 앉은 채로 목례를 했다. 앞자리에 앉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아니시군요. 닮긴 많이 닮았지만.’하고 말했다. 그녀의 눈가에 알 수 없는 그늘이 어려 있었다. 그녀가 핸드백에서 책 한 권을 꺼내면서 말했다.

“혹시 이 책…. 그 사람 거예요.”

이상의 ‘날개’ 문고본이었다. 표지의 색깔이 많이 바래 있었다. 그녀가 맨 뒷장 안쪽을 펼쳐서 내 앞으로 내밀었다. 연필로 쓴 글씨가 있었다.

담배 - 1,700원, 차비 - 1,200원, 점심 - 4,500원.
그 밑에 전화번호와 함께 ‘하나화실 김선주’라고 씌어져 있었다.

“그 사람 글씨예요. 이게 제 화실 전화번호구요. 지금은 문을 닫았어요. 전시회 때 그 사람이 적은 건데 이 책을 두고 가서 아마 내 전화번호를 모르고 있을 거예요.”

그 여자가 핸드백에서 흰 종이와 연필을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타원형으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가운데를 십자가 모양으로 4등분했다. 얼굴을 크로키해가면서 그 남자의 인상특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머리는 귀가 덮일 만큼 길고, 눈썹은 짙고, 눈은 오목하고, 광대뼈는 좀 나왔고, 코는….”

아주 숙달된 솜씨로 단번에 그려냈다. 그날 전시회가 끝날 때쯤, 그 남자가 혼자 들어와서 그림을 쭉 둘러보고는, 그녀가 앉은 접수대 바로 뒤에 걸려있는 초상화 앞에 서더란다.

‘슬픈 눈빛이군.’하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그 아래에 앉아있는 그녀를 쳐다보고는 ‘음, 이 아가씨 자화상이군.’하더란다.

자신의 자화상을 알아보는데 감격해서 차 한 잔 사드리고 싶다고 했더니, 좋다며 그날 저녁 7시에 이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단다. 화실 전화번호랑 이름을 알려주었더니 이 책을 꺼내 뒷장에다 적더란다. 그림을 더 보고 간다며 책을 접수대 위에 놓아두었는데, 나중에 보니 책은 그대로 있고 사람은 없어졌단다. 그날 저녁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더란다.

“분명히 그 건물 안에 근무하는 사람이에요. 꼭 좀 찾아주세요.”
“찾아주면 어떡하실래요?”

나는 약간 장난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때 경찰차 소리인지 앰뷸런스 소리인지 단속적(斷續的)인 경보음이 들려왔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그 여자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더니 옆으로 픽 쓰러졌다. 내가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일으켜 세우며 ‘괜찮아요?’하고 물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뜨는가 싶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그리고는 꿈꾸는 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생각나요? 그날 여기서 나눈 얘기들…. 함께 설악산에 가기로 했었죠.”

갑자기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입구에 들어섰고 부인인 듯한 여자가 뒤따라 왔다. 그 남자는 두리번거리다가 곧 이 쪽으로 다가왔다. 그 남자가 다짜고짜 내게 기대고 있는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더니, 함께 온 여자에게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그녀가 발버둥을 쳤지만 그 남자가 험악한 표정을 짓자 이내 수그러졌다. 그녀가 따라 나가면서 소리쳤다.

“내일 또 만나요. 이 자리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서야 그 남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얘가 혹시 키가 175센티쯤 되고 금테안경을 쓴 남자얘기 안 하던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여자의 오빠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가 좋아하던 남자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죽었단다. 그때부터 화실에 틀어박혀서 그 남자 초상화만 그리고 있더니, 며칠 전에는 이 근처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고 헛소리를 하더란다. 그래서 집에 가둬놓고 있는데 부인이 시장에 간 사이에 또 도망을 갔단다.

“나갔다 하면 저 건물 근처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여기에 와요. 벌써 세 번째요. 그 남자를 만났던 곳이래요. 며칠 전에는 글쎄 그 남자가 저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뒤쫓아 갔는데 따라가서 보니 없더래요. 오늘은 아예 입원시키려고 앰뷸런스를 불러왔소. 틀림없이 여기에 있을 줄 알았소.”

그 남자가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탁자 위에는 그녀가 그린 그림과 책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책을 들고 커피숍을 나왔다. 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차도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틈에서 앰뷸런스의 경보음이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 꾸는 개똥벌레’ ‘삼국지 인물 108인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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