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에 대한 담론
콩트에 대한 담론
  • EPJ
  • 승인 2013.02.12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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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54)

약속장소인 구로도서관 지하 2층 시청각 실에 들어서니 회장님이 인사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빈자리를 찾아 자리에 앉자 회장님이 막 인사말을 끝내고 새로 온 신입회원을 소개한다며 한 사람을 앞으로 불러냈다.

아담하고 귀염성 있게 생긴 여자였다. 커트 머리에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었고, 등에 맨 가방이며 창을 한껏 구부려 쓴 모자로 보아 영락없는 신세대였다. 40대와 50대가 주류이고, 드문드문 30대가 끼어있는 구로문인협회에 드디어 20대가 들어왔구나 싶어 내심 반가웠다. 회장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이현아 씨를 소개합니다. 심리 묘사에 뛰어난 감각을 지닌 신세대 소설가입니다. 콩트 전문입니다. 콩트로 받은 상을 합치면 아마도 다섯 손가락이 모자랄 거예요. 자, 인사하세요.”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현아입니다. 회장님께서 너무 과찬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는 다시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콩트로 상을 많이 받았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요즘 콩트 땜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 않은가. 사무국장이 자리를 돌며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교정을 보시고 다시 제게 돌려주세요. 교정이 끝난 분은 지난번에 갔던 싸리골로 가세요. 거기에 저녁식사를 준비시켜놨습니다.”

‘구로문학’ 제5집에 들어갈 원고였다. 자신이 낸 원고를 직접 교정하라고 나눠주는 것이었다. 지난봄에 허겁지겁 써냈던 두 편의 콩트, 수필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으면서도 콩트를 냈었다. 수필을 쓰는 회원들에게 미안스러워서 작가메모에다 다음 호부터는 꼭 수필을 내겠다고 썼었다.

활자화된 교정지를 읽어가다가 몇 군데 뜯어고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관두었다. 사보 몇 군데에서 청탁을 받으면서 쓰기 시작한 콩트, 쓰는 김에 60편만 채워서 콩트집을 내려고 본격적으로 시작한 콩트, 이제 대여섯 편만 쓰면 되는데 골인지점을 바로 앞에 두고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다.

좀 전에 인사를 했던 그 여자 신입회원이 문 쪽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교정지를 후닥닥 챙겨서 사무국장에게 건네주고 뒤따라 나갔다. 그녀가 도서관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며 서있었다. 말을 걸었다.

“이현아 씨, 저는 수필 쓰는 최승우입니다. 왜 여기 서있어요? 싸리골로 가시지 않고….”
“아, 예. 싸리골이 어딘지 몰라서요.”
“같이 갑시다. 우리 협회에 처음으로 신세대가 들어온 것 같네요. 실례지만 나이가…?”
지름길로 가지 않고 일부러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몇 살로 보이세요. 어디 한번 맞춰 보세요.”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보기보다는 활달했다.

“글쎄, 스물일곱 아니면 여덟?”
“예? 히히, 잘 보시네요.”
그녀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둠 속에서도 눌러쓴 모자 아래로 까만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참, 콩트 전문이라면서요. 저는 요즘 콩트 땜에 죽을 지경이에요. 그럭저럭 한 오십여 편은 썼는데 더 이상 진도가 안 나가요. 현아 씨가 콩트 전문이라는 말을 듣고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어요.”

“아, 아닙니다. 전에는 콩트를 좀 썼는데 요즘은 중편 쪽에 매달리고 있어요. 콩트는 끊임없이 소재를 찾아내야 되고, 어떤 소재는 너무 아까워요. 충분히 단편이나 중편으로 뽑을 수 있는데 콩트로 쓰고 나면 버려야 되거든요.”

“맞아요. 저도 어떤 소재는 콩트로 쓰고 나면 아깝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이제 대여섯 편만 더 쓰고 끝내려고 하는데….”

“그래요? 혹시 반전에 대한 강박관념 땜에 그런 거 아니어요? 반전이 없으면 콩트가 안 된다는 고정관념에 짓눌려서….”
예리했다. 내가 처한 고민을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집어냈다.

“맞아요, 반전. 그걸 갖춘 소재를 찾는 게 여간 어렵지가 않네요.”

“거기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예전에는 반전이 없으면 콩트가 아니라고도 했지만, 요즘은 아니어요. 인생의 짜릿한 편린(片鱗), 그걸로 족해요. 대가들이 쓴 걸 봐도 그래요. 전에 제가 동서커피문학상을 받은 작품도 수필 감을 변형시켜서 콩트로 만들었는데, 반전의 임팩트가 약했는데도 뽑혔거든요. 요는 반전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나름의 재미와 의미, 독창성을 갖추고 있으면 된다는 거죠.”

싸리골에 들어서니 회원들이 거의 다 와있었다. 그녀는 방 안쪽에 여자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가고 나는 남자들이 모여 있는 문 쪽에 앉았다. 몇 순배 소주잔이 오가고, 삼겹살로 배를 좀 채우고 나니 담배 생각이 났다. 홀(Hall)로 나와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좀 있으니 현아 씨가 나오더니 싱긋 웃으며 앞자리에 앉았다.

“담배 피우는 모습이 멋있어요.”
“그래요? 고마워요.”

불빛 아래에서 보니 아까보다 나이가 좀 더 들어보였다. 담배 생각이 나서 나왔나 싶어 ‘혹시…?’ 하며 담배를 꺼내 권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괜찮으시다면….’ 하면서 선뜻 받는 것이 아닌가. ‘어린 여자가 좀 당돌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자가 담배 피우는 거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더욱이 글쟁이인데 싶어 곧 생각을 바꾸었다.

‘괜찮습니다. 피우세요.’ 하며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그녀가 연기 한 모금을 길게 내뿜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담배 피우는 거 건방져 보이죠? 사실은 아까 같이 오면서 나이를 속인 게 맘에 걸려서 일부러 나왔어요.”
“그럼 나이가…, 더 된다는 말인가요?”
“그럼요, 큰애가 대학생인 걸요. 입고 나올 옷이 마땅찮아 큰애 옷을 입고 나왔어요. 아까 최 선생님이 스물일곱, 여덟이라 했을 때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어요.”

그녀가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아, 마흔 네 살이었다.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 꾸는 개똥벌레’ ‘삼국지 인물 108인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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