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동 별곡
구로동 별곡
  • EPJ
  • 승인 2012.12.1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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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콩트마당(52)

“구로동에도 아파트가 있어?”

대학에 다니는 작은딸이 학교 선배한테 들었다는 이 말이, 내가 20년 가까이 살던 구로를 떠나야겠다고 마음먹는 데 결정타가 되었다. 강남에 사는 친구로부터, 삶의 질 운운하며 수준이 떨어지는 동네에 산다고 괄시를 받아도 참을 만했는데 딸아이가 그런 말을 들었다니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아직도 ‘구로’ 하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공장 굴뚝에서 매연이 뿜어져 나오고, 방 하나 부엌 하나짜리 벌집이 덕지덕지 늘어서 있고, 안양천 제방에는 우범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아니다. 연기를 내뿜는 공장들은 퇴출된 지 오래고 그 자리에 들어선 건물에는 디지털산업, 즉 첨단정보업종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덕지덕지 늘어서 있던 벌집들은 대부분 재개발되어 아파트단지로 변했다. 안양천변은 깨끗하게 정비되어 곳곳에 체육시설과 휴게시설이 들어서있고, 한밤에도 가로등이 대낮처럼 훤하게 켜져 있다. 그런 곳에 어떻게 사느냐고 하니 내 속이 뒤집어질 수밖에.

내가 구로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거의 20년 전 큰딸이 유치원에 입학할 무렵 개봉동 원풍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였다. 거기서 두 딸을 키우며 별 탈 없이 살았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막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아파트가 물에 잠겼으니 오늘은 집에 들어오지 말고 딴 데 가서 자고 출근하라.’는 것이었다.

집이 물에 잠겼다는데 외박이라니 그게 어디 될 법한 말인가. 나는 조퇴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지하철 1호선 인천행은 구로역까지만 운행했다. 다음역인 개봉역 철로에 물이 차서 운행이 안 된다는 거였다. 구로역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고척교를 건너면서 내려다 본 안양천, 누런 진흙탕물이 넘칠 듯 바로 발아래에서 출렁거렸다.

개봉입구에서 광명시 쪽으로 들어서서 고가도로에 올라서 보니 원풍아파트가 온통 흙탕물에 잠겨있었다. 나는 양복 윗도리를 벗어서 머리 위로 받쳐 들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목에까지 차오른 물길을 헤치고 집에 들어갔다. 전기와 수도가 모두 끊어져 있었다. 옥상에 올라가 보니 온 천지가 흙탕물 바다였다.

밤엔 촛불을 켜야 했다. 이틀 만에 물이 빠지자, 주민들이 모두 나와 대청소를 했다. 땅바닥에 깔린 흙과 오물을 치우고 쓰레기를 모아서 버리고…. 그 때문에 이웃 주민들과도 친해졌다. 전기는 3일 만에 들어왔지만 물은 일주일 동안 급수차에서 받아서 썼고, 세수한 물은 변기에 부어 재활용했다.

그 물난리 때문에 재건축이 확정되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도 두 번인가 아파트에 수재(水災)가 났었기 때문에 까다롭다던 안전진단을 수월하게 통과한 것이다. 큰아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2년 넘게 이곳에서 살았는데….

나는 재건축 때문에 곧 허물어질 원풍아파트를 팔고 구로1동 연예인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지하철 1호선 구일역에 가까운 그 동네는 전 세대가 아파트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두 딸은 아파트단지 안에 있는 구일중학교와 구일고등학교에 다녔다. 학교가 가깝다고 아주 좋아했다.

구로는 학군이 안 좋다고들 하지만 그건 본인 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실제로 두 딸 모두 과외는커녕 학원 한 번 가지 않았어도 원하는 대학에 특차로 들어갔다. 하나는 S교대에, 하나는 Y대 영문과에….

작은애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니 문제가 생겼다. 강남역 부근에 직장이 있는 나뿐만 아니라 두 딸 모두 지하철 2호선을 타야했던 것이다. 그런데 집에서 1호선 구일역까지 걸어가는 데는 15분에서 20분쯤 걸렸다. 그러다 보니 셋 모두 아침마다 2호선 대림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다니곤 했다. 딸들이 지하철 막차를 타고 올 때는 불안하기도 했다.

작은딸이 학교선배한테서 ‘구로동에도 아파트가 있느냐?’는 말을 들었다는 그 다음날,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다. 사실 그동안 구로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었다. 언젠가는 구로를 떠날 거라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있었기 때문이다. 구로 지역에 오래 살다보니 조금씩 정이 들긴 했지만…. 얼마 안 있어 집이 팔렸다. 이사 온 지 6년만이었다.

그 돈으로는 강남에 전세금도 안 되었다. 신도림역 주변을 중점적으로 둘러보았다. 1호선과 2호선이 만나는 신도림역은 지하철 교통이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서울역 종로 등은 물론 강남 잠실 등 서울중심 어디든 한 번에 갈 수 있고, 부천 인천 안양 수원 의정부 등 서울 인근 도시들도 한 번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이런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신도림역에서 남쪽출구로 나오니 제법 큰 아파트단지가 보였다. 역에서부터 ‘신도림태영타운’이라고 써진 단지 정문까지 오는데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가까운 부동산 업소에 들어갔다. 단지도 크고, 입주한지 몇 년 되지 않아서인지 아파트 내부도 깔끔했다. 신도림동에 산다고 하면 구로동에 산다고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그런대로 위안도 되었다.

로얄동 로얄층 매물이 하나 있어서 바로 계약을 했다. 모자라는 돈은 융자를 받기로 하고…. 중개인이 집주인에게 도장 가지고 내려오라고 연락을 했다. 계약서를 써 내려갔다. ‘구로구 구로동 1267번지 신도림태영타운….’

나는 ‘구로동’이라는 글자를 보고 깜짝 놀라 큰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여기 신도림동 아니에요?”

중개인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구로5동입니다.”

“그럼 왜 신도림태영타운이라고 이름을 붙였죠?” 내가 되물었다.

중개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아, 그건 신도림역에서 가깝다고 붙인 이름이겠죠.”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혼자 중얼거렸다.
‘구로동 귀신이 될 팔자인가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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