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에서 생긴 일
목욕탕에서 생긴 일
  • EPJ
  • 승인 2012.08.2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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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마당(49)

한철이의 살빼기에 대한 열의는 실로 대단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거의 매일 학교 앞 탁구장에서 땀을 흘렸는데 알고 보니 한 달씩 티켓을 끊어서 다니고 있었다.

중학교 때 처음 탁구를 배웠고 그 이후 정기적으로 탁구장에 다녔단다. 그러다가 작년에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할 때는 거의 탁구를 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일 년 동안에 체중이 거의 10킬로 정도가 불어났단다.

한철이는 내가 대학생이 되어 처음 사귄 같은 과 친구이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옆자리에 앉은 그를 처음 알게 되어 일 년 내내 단짝처럼 붙어 다녔다.

처음 봤을 때 좀 뚱뚱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렇게 열심히 살을 빼야 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좀 달랐다. 부모가 모두 비만형이어서 필시 자기도 살이 찔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다. 그래서 미리부터 부지런히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였다.

그의 탁구 파트너는 대부분 나였다. 지난 봄 이후 거의 일 년 내내 그를 따라 탁구장에 드나들었다. 나 또한 탁구를 확실히 배우고 싶은 마음에 기꺼이 그의 파트너가 되어주었다.

내게 무슨 일이 있어 함께 탁구장에 가지 못할 때는 탁구장 주인이 파트너가 되어주었다. 한 쪽 다리를 약간 저는 탁구장 주인은 친절하고 실력도 가히 프로급이었지만, 불편한 몸으로 공을 받아주는 것이 안쓰러운지 한철이는 한사코 나와 함께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매일 탁구장에서 땀을 흘리고 나면 몸도 가뿐해지고 기분도 상쾌했으나 그 뒤가 문제였다. 한철이는 학교 기숙사에 있으니 매일 샤워를 하는 것이 별 문제가 없었으나, 내 경우엔 하숙집의 눈치가 보여서 매일 샤워를 할 수가 없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수도요금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얘기를 할 때마다 나보고 하는 소리 같아 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날씨가 더울 땐 눈치껏 샤워를 해왔으나 가을에 접어들어 날씨가 쌀쌀해지자 도저히 찬물로 샤워를 할 수가 없었다. 부득이 공중목욕탕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목욕비가 만만찮았다.

결국, 나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한 그와의 탁구시간을 이런저런 핑계로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줄였다. 11월이 되자 나는 기말시험을 핑계로 그와 탁구 치는 것을 아예 끊었다. 그러나 그는 매일 탁구장에 드나들었고 그 역시 기숙사에서 뜨거운 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요즘 자주 목욕탕에 가는 것 같았다.

기말시험을 마치고 하숙집으로 돌아와 시골에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찾아왔다. 탁구장에서 바로 온 듯 얼굴이 온통 땀투성이였다. 그는 다짜고짜 좋은 구경을 시켜줄 테니 빨리 나오라고 했다. 그가 날 데리고 간 곳은 우리 학교와 S여대 사이에 있는, 탁구를 치고 나면 자주 가던 재래식 목욕탕의 맞은편 이층 카페였다.

우리는 그 카페의 창가에 앉아 콜라 두 잔을 시켰다. 무슨 구경을 시켜줄 거냐고 내가 묻자 그는 ‘조금만 기다려!’ 하며 계속 목욕탕 입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체육복을 입은 늘씬한 아가씨들 몇 명이 여탕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체육복을 보니 S여대 학생들이었다.

“됐다. 들어가자. S여대 무용과 학생들이야. 오늘 쟤들 누드를 생비디오로 보여줄게.”
“뭐, 쟤들 누드를? 어떻게?”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자 그가 다시 말했다.

“확실히 보여준다니까. 아무 말 말고 따라만 와.”

그가 앞장서서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낮 시간이어서 그런지 탕 안은 거의 비어 있었다. 이 목욕탕은 지은 지 오래되어 좁고 시설도 낡았으나 워낙 위치가 좋아 우리학교 학생들과 S여대 학생들이 많이 오는 편이다.

그 친구는 목욕탕에 왔다하면 바로 한증실로 들어간다. 이곳 한증실은 요즘 새로 지은 사우나처럼 넓지 않고 겨우 한 명이 들어가 뜨거운 수증기만 쐴 수 있는 구식이었다. 한 사람이 한증실 안에 들어가 있으면 다음에 들어갈 사람은 그 사람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내가 욕조 옆에 앉아서 머리를 감고 있을 때, 한증실에 들어간 그 친구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히죽히죽 웃으며 나왔다. 그리고는 내 옆에 앉으면서, 한증실에 들어가면 아까 그 여학생들이 보인다는 거였다.

“뭐, 여탕이 보인다고?”

나는 찬물을 흠뻑 적신 타월을 들고 한증실로 들어갔다. 한철이가 일러준 대로 여탕 쪽 모서리 온수관을 찾아 타월을 대고 그 위에 한쪽 뺨을 밀착시켰다. 칸막이 나무 틈 사이에 약간 벌어진 곳을 검은 천으로 가려놓은 부분이 있었다.

바로 너머가 여탕의 한증실이었는데, 여탕 한증실은 출입문이 다 닫혀 지지 않는 듯 약간 열려져 있었다. 검은 천을 제친 틈과 여탕 한증실의 약간 열려진 문 사이로 여탕 안이 보였다. 한 마디로 무릉도원이었다.

벌거벗은 인어들, 샤워를 하고 있는 젊은 여자들의 나신(裸身)이 꿈결처럼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앉아서, 서서…. 아까 본 그 여학생들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황홀한 광경에 숨이 막혔다.

내 아랫도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 때문에 타월에 닿은 뺨 부분이 뜨끔뜨끔해왔지만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앗!’ 나는 엉겁결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넋을 잃고 보다가 뜨거운 온수관에 뺨이 닿은 것이다. 그 격심한 통증….

한증실을 나오자 한철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봤어? 어때?” 하며 킥킥거렸다. 그도 처음엔 몰랐으나 요즘 거의 매일 이 목욕탕에 드나들다 보니 한증실의 그 개구멍(?)을 알게 되었단다. 얼마 전부터는 S여대 무용과 학생들이 들어오는 시간을 알게 되어 늘 그 시간에 맞춰 목욕탕에 들어왔다고 한다.

나는 다음날 고향으로 내려갔고, 이듬해 봄 상경하자마자 다시 그 무릉도원을 찾았지만 천 조각으로 가려놓은 그 자리는 휴전선 철책만큼이나 튼튼하게 두꺼운 철판으로 가려져 있었다.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 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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