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대신 닭
꿩 대신 닭
  • EPJ
  • 승인 2012.07.10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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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47)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 혼자서 식은밥에 풋고추와 된장으로 점심요기를 한 임 씨는 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고있었다. 잠결에 ‘병태 아부지요!’하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다. 마을 뒷산 서당골에 사는 광호가 삶은 감자를 꿴 꼬챙이를 들고서 마당에 서있었다. 임 씨는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와?’하고 물었다.

“서당골 밭에 꽁이 와글와글합디더. 총만 있었다카믄 몇 마리는 잡았을 낀데….”
임 씨는 당장 일어나 총을 들고 서당골 밭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6학년 아이의 말만 듣고 체통 없이 벌떡 일어날 수는 없었다. 광호는 총이 있으면서 왜 꿩을 잡으러 가지 않느냐는 듯 감자가 꿰인 꼬챙이를 허공에다 대고 조준하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자 멋쩍은 듯 문밖으로 사라졌다.

여름방학이라 여편네가 병태를 데리고 친정에 갔기 때문에 벌써 며칠째 홀아비 생활이다. 잔소리꾼 여편네, 있을 땐 모르겠더니 없으니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늘이나 내일쯤에는 오겠지….

그는 소풀이나 베어올까 생각하고 빈 지게에 낫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뒷산 서당골 밭으로 털레털레 올라갔다. 밭에는 엊그제까지만 해도 수염 달린 옥수수들이 황소의 그것(?)처럼 탐스럽게 영글고 있었는데 밑둥치에 달린 것들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이빨이 다 빠져있었다.

무엇이 쪼아 먹은 것이 분명했다. 그 옆 콩밭의 풋콩도 숱하게 까발개져 있었다. 그때 저쪽 호박밭에서 커다란 호박 잎사귀가 얼핏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잘못 봤나 싶어 자세히 보니 호박 잎사귀 사이에 무엇이 숨어있었다. 꿩이었다. 서너 마리는 되어 보였다.

순간 임 씨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스쳐갔다. 그 자리에 지게를 받쳐놓고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고무신에 땀이 차서 상당히 미끄러웠다. 벗겨지고 다시 신기를 여러 번 그는 맨발에 마른 흙고물을 수없이 묻혀가며 집을 향해 뛰었다. 땀이 팥죽같이 흘러 온몸을 적셨다. 아까 광호가 하던 얘기가 떠올랐다. 총을 가지고 올 걸….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루와 안방에 흙발 도장을 찍으며 다락에 넣어두었던 공기총을 집어 들고 다시 뛰어나왔다.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마을 공동우물에서 주전자에 물을 담고 있는 광호가 보였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었다. 그러나 아뿔싸, 우물 옆을 지나는 순간 들키고 말았다. 총을 들고 있는 임 씨를 발견한 광호가 주전자를 팽개치고 쫓아왔다. 밭머리 산등성이를 오르면서 임 씨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니는 저만치 떨어져서 오거래이.”
광호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밭머리에 이르자 엎드려서 살금살금 기었다. 땅에서 솟는 열기 때문에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뒤따라오던 오던 광호도 헉헉거리고 있었다. 밭둑엔 제법 큰 뽕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밑으로 숨어들었다.

장끼의 꼬리 하나가 호박잎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총알을 장전하고 총을 어깨에 올렸다. 그의 바로 뒤까지 따라온 광호가 풀밭에 엎드린 채 용을 쓰고 있었다. 호박 잎사귀 사이로 장끼 한 놈이 머리를 내밀었다.

그가 막 조준을 끝내고 발사하려는 찰나, ‘광호야! 광호야!’하는 고함소리가 밭 위에서 들려왔다. 광호엄마의 목소리였다. 엎드려있는 광호를 발견했는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이노무 새끼, 물은 안 떠오고 거기 엎드려서 뭐하는 기고?”
“엄마, 쉿, 꽁, 어어 꽁.”

광호가 손가락 하나를 입에 갔다대며 말했지만 호박밭에 있던 꿩들이 후다닥 도망치고 말았다. 뛰어가는 놈, 날아가는 놈…. 총 한번 못 쏘아보고 꿩을 다 놓쳐버린 임 씨, ‘이 마을 여편네들은 뭔 목소리가 그리 큰지.’하고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그때서야 임 씨 발견한 광호엄마가 소리쳤다.

“으엥, 병태 아부지는 와 거기 엎드려 있었는교?”
그는 대답대신 헛기침만 두어 번 하고 다시 지게 있는 곳으로 향했다. 광호는 물주전자를 가지러 부리나케 우물로 뛰어 내려갔다. 임 씨는 소풀이나 베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총을 지게에 얹고 산을 내려왔다.

광호네 집 옆에 붙어있는 임 씨의 밭을 지날 때였다. 닭 예닐곱 마리가 임 씨의 밭을 파헤치고 있었다. 광호네 닭이 분명했다. ‘훠이, 저리 가! 이노무 달구새끼들.’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닭들은 들은 체도 않고 열무잎 사귀 쪼기에 열중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임 씨는 그 자리에 지게를 받쳐놓고 ‘꿩 대신 닭이군.’하며 총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차마 닭에게는 쏘지 못하고 닭이 없는 쪽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닭들이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그 순간, ‘꽥-’ 소리와 함께 깃털이 날아올랐다. 열무 잎이 무성
한 곳에 닭 한 마리가 숨어 있다가 세 번째 총알에 맞은 모양이었다. 총소리를 듣고 담 너머로 빼꿈 내다보던 광호 아버지가 소리쳤다.

“아이고, 우리 달구새끼 아인가배. 자네는 꿩하고 닭도 구별 못하나. 닭을 보고 총을 쏘게.”
광호애비가 담을 훌쩍 뛰어넘더니 쓰러진 닭의 날갯죽지를 잡고 치켜들었다. 암탉 한 마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임 씨는 아무 말도 못했다. 죽은 닭 값으로 사료 한 포대를 주기로 했다. 죽은 닭은 광호애비가 들고 갔다.

‘오늘은 광호네 식구들 땜에 일진이 안 좋구만.’ 임 씨는 투덜거리며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대충 씻고 마루에서 총을 정성 들여 닦았다. 그때 광호애비가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아따, 문둥이가 새끼를 낳으면 씻겨 조진다더니 병태애비는 그 총 문질러 조질라는 가배.”
사료를 받으러 왔나싶어 임 씨가 사료포대를 꺼내려하자, 광호애비가 손을 내저으며 갖고 온 비닐봉지를 열었다. 털이 모두 뽑혀진 닭 한 마리가 들어있었다. 아까 임 씨의 총에 맞아 죽은 닭이었다.

“사료는 관두게. 아까 서당골 밭에서 광호에미 땜에 꿩을 놓쳤다는 얘기 들었구만. 이 닭 병태애비가 삶아 먹든지 튀겨 먹든지 하게. 그래야 내 맘이 편할 것 같구만. 그 대신 꿩 잡으면 나도 한 마리 주게.”

그때서야 임 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닭 대신 꿩이라, 그것도 괜찮지. 허허허.”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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