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부장의 술버릇
윤 부장의 술버릇
  • EPJ
  • 승인 2012.06.19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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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생명보험회사 교육부의 왕고참 윤태홍 과장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이가 이미 오십이 넘은 데다, 연수과장으로 십 년 넘게 있었기 때문에 교육부의 터줏대감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의 직속상사인 교육부장까지도 그보다 나이가 적고 입사경력이 짧은 탓에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교육부의 윤 과장’ 하면 그 회사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시간만 죽여 가는 것이 윤 과장의 하루일과였다. 조간신문 몇 가지를 독파하는 것으로 오전을 때우고, 열두 시에 점심 먹으러 나가면 빨라야 두 시, 보통 때는 세 시쯤 되어야 들어왔다.

들어오면 여기저기 복덕방에 전화를 걸어 아파트 시세를 알아보거나 어디서 주워들은 부동산 투자정보에 대해 고견을 나누는 일이 오후의 주요 일과였다. 좀 있으면 또 석간신문을 찾는다. 오후 네 시쯤 되면 교육부의 서무를 맡고 있는 미스 김이 부리나케 달려가서 우편함에서 신문을 찾아온다. 그렇지 않으면 왜 아직 신문이 안 왔느냐고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개기름이 자르르한 머리엔 늘 비듬이 듬성듬성 붙어있는데다, 여사원이 옆을 지나가면 엉덩이를 툭 치는 버릇이 있어서 여사원들이 모두 슬슬 피했다. 딱 한 가지 직원들에게 잘 보인 점이 있다면, 퇴근 시간이 되면 칼같이 직원들을 퇴근시켜준다는 점이다.

보통, 일과시간에 빈둥빈둥 노는 사람일수록 퇴근시간이 될 때쯤 일거리를 꺼내놓거나 부하직원들을 불러 새 일거리를 주는 법인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여섯 시 땡~ 하면 퇴근했다.

사내에서는 한 때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그런 사람을 자르지 않고 월급을 꼬박꼬박 주고 있는 것은 윤 과장이 이 회사 설립자와 친척간이기 때문이라는 둥, 사장과 같은 고향이기 때문이라는 둥….

그러나 윤 과장과 입사동기인 계약부 담당이사가 언젠가 하던 말을 미루어 보면 결코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윤 과장이 처음 우리 회사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적을 올려 윗분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단시일에 주임, 영업소장을 거쳐 본사 대리, 과장으로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그 당시 ‘청량리 영업국의 윤태홍 소장’하면 사내 뿐 아니라 보험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외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영업소의 주임으로 있던 시절,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밤늦게 술을 마시다 옆 사람과 시비가 붙는 바람에 경찰서에 끌려가 하룻밤을 새웠는데, 다음날 오후에 풀려 나와 사무실에 오더니 보험청약서 두 장을 꺼내 놓더란다. 밤새 유치장 안에서 보험 2건을 계약해온 것이다.

지금도 신입사원 교육을 할 때 윤 과장의 영업실무 강의는 유명하다. 재미있고 알차고 시간가는 줄 모르게 강의를 하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회사 내에서 몇 안 되는, 실무경험이 풍부한 간부로 손꼽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본사 연수과장으로 부임해올 때만 해도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그 후 몇 번 승진에 누락되고 난 뒤 영 의욕을 잃고 나태한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술 마시고 귀가하는 날이 잦아지고 술 마신 다음날엔 어김없이 오후 두 시나 되어서야 출근을 했다. 몇 번 부장님으로부터 정중한(?) 주의를 받기도 했으나 그 버릇은 도무지 고쳐지지 않았다.

그런데 대망의 새해가 되자, 사람팔자는 정말 알 수 없는 것인지 교육부에 큰 이변이 일어났다. 2월 주주총회 때 교육부장이 영업담당이사로 승진되자, 만년과장으로 있다가 직장생활을 마감할 것 같았던 윤 과장이 드디어 차장으로 승진되면서 교육부장 직무대행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한꺼번에 두 계단을 올라선 것이다.

우리의 윤 부장(엄격히 따진다면 차장이다)이 다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발령 난 다음날 독일제 금테 안경을 새로 맞춰 끼고 출근하더니, 업무지시나 대화중에 부쩍 영어를 많이 섞었다. ‘프라이드’를 ‘프라이버시’라고 하는 등 간혹 영어를 틀리게 사용하여 젊은 직원들의 코미디 소재가 되는 때도 있었지만, 뭐 그 정도야 애교로 봐줄 수도 있는 것이고….

머리도 전보다는 자주 감는 것 같았고 점심시간 후에 늦게 들어오는 일도 눈에 띄게 줄었다. 하루 종일 신문 보는 일도 없어졌고 여사원 엉덩이 툭 치는 버릇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참으로 신통한 일이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술 마시고 나면 다음날 늦게 출근하는 버릇만은 이미 고질이 되어서인지 고쳐지지 않았다. 오후 두 시쯤에 나오던 것이 열한 시쯤으로 당겨졌을 뿐,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그랬다.

지난 달 어느 월요일 아침이었다. 입사한 지 서너 달 남짓 된 연수과의 신입사원 주영태 씨가 아침 열 시가 넘도록 출근하지 않았다.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 주영태 씨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젯밤, 결혼하는 친구 함 팔러 갔다가 과음을 해서 도저히 못 일어난다며, 이따 오후에 꼭 출근시키겠다고.

열한 시쯤 되었을 때 윤 부장이 주영태 씨를 찾았다. 주영태 씨와 함께 입사한 옆자리의 동료 신입사원이 곧이곧대로 보고를 했다.

“예, 아직 안 나왔습니다. 어젯밤에 과음을 해서…, 오후에 나온답니다.”
그 답변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 친구,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이고 말았다.
“부장님 닮은 것 같습니다.”

좌중에 때 아닌 폭소가 터졌고 순간 윤 부장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아차!’ 싶어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그날 오후 한 시가 넘어서 출근한 주영태 씨, 결국 윤 부장에게 불려가 크게 혼이 난 것으로 그 일은 마무리가 되었다.

한 가지 신통한 일은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한 달이 지난 오늘까지, 윤 부장의 술 마신 다음날 늦게 출근하는 버릇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상사의 위엄으로도, 벼락승진의 영예로도 못 고친 윤 부장의 술버릇, 새파란 신입사원 둘이서 거뜬하게 고친 것이다.

누구에게나 임자는 따로 있는 모양이다.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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