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힘’으로 불을 지피다, 한전 중앙교육원 고주경 교사
‘강원도의 힘’으로 불을 지피다, 한전 중앙교육원 고주경 교사
  • 한동직 기자
  • 승인 2007.07.30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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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 인] 한전 중앙교육원 고주경 교사

바다로 내려간 은어가 반드시 제 고향을 다시 찾아 떠나오는 건 예지가 아니다. 하찮은 미물들이라고 일생에 굴곡이 없을까, 하지만 저 깊숙이 배어있는 본능은, 죽지 않고는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고향은 추억으로 얼룩진 눈물의 기억이 아니라 어머니의 어머니, 아버지의 아버지가 만든 ‘유전적 이중 나선 구조’에 새겨져 있는 작은 우주다.

서울내의 웬만한 지역에 다녀오려면 지하철을 타는 것이 빠르다는 건 수도권에서 사는 사람들에겐 상식이다. 더구나 여름에는 냉방으로 무더운 밖의 날씨에 비해 차내가 훨씬 시원하다. 그래서 지하철을 탄다.

한전 중앙교육원은 태릉에서 가깝다. 아마도 서울에서 공기 좋기로는 어디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맑은 지역인 공릉동 인근에는 서울특별시 노원구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경계에 있는 높이 508m의 불암산이 있다.

서쪽으로는 북한산이 마주보이고, 북서쪽과 북쪽으로는 도봉산과 수락산이 각각 솟아 있다. 큰 바위로 된 봉우리가 중의 모자를 쓴 부처의 형상이라 해 불암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필암산 또는 천보산이라고도 불렸다. 이렇듯 수도권 북부의 3대 명산들이 근방에 있으니 공기가 맑고 수풀이 우거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주 옛날에는 돌배가 많이 나기로 유명했고, 3~40년 전에는 돼지갈비집이 많기로 유명했던 태릉입구에서 육사 쪽으로 가다가 상계방향으로 길을 틀어 약 10분쯤 들어가면 원자력병원 뒤편에 위치한 한전 중앙교육원이 나온다.

수목원 같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작은 호수 같이 물길을 뿜어내는 분수대, 시골 과수원 모양으로 꾸며놓은 마당이 있고 잘 가꿔진 나무들이 교육원의 정원을 푸르게 하고 있다.

저만치 본관 입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아마도 오늘 만나게 될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제가 무슨 기사거리가 된다고…”라며 겸손함이 느껴지던 전화 목소리의 바로 그 주인공이 반갑게 맞아준다.

 

70년 직원 가족 특채로 영월화력 입사, 37년간 한전에 몸담아

중앙교육원에 와 배전분야의 교사 업무를 수행한 지 12년째를 맞고 있는 고주경 중앙교육원 교사는 온화하면서도 자상하고 때로 엄할 것도 같은 모습의 천생 선생님이었다. 그의 고향은 산 좋고 물 맑기로 잘 알려진 영월이다.

고향이란, 떠나온 자에게 무시로 조상들의 든든한 은덕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어머니의 젖가슴이 되어 눈시울에 얼룩진 타관의 설움을 보듬어 주기도 한다. 그의 고향인 영월 덕포리에서 동강을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면 어라연에 다다른다.

“어린 시절 그 맑은 동강의 물속으로 잠수하고 고기잡이 하던 그 영월이 한 때는 시멘트공장, 석탄채광, 발전소의 건설 등으로 문화적 혜택을 비교적 많은 받았던 지역이었는데, 지금은 인구 5만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고 교사는 발전이 더딘 고향에 대한 걱정인 듯 점점 주민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영월의 현실을 걱정한다. 오염이 되지 않은 그곳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길 만큼 가장의 역할에 충실해 왔다.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지만 부친의 형제가 9남매이고 자신의 형제가 7남매이다 보니 살던 고향의 인근에 친인척들이 많았다. 거의 모든 부모들이 그때 그 시절에는 가난하고 생활하기조차 힘들어 더욱 완고해지기도 했겠지만 표현이 잘 안 된 것일 뿐 오히려 순수한 속정이야 어디에 비하랴.

서로 배려하고 정이 많았던 많은 가족과 형제들 속에서 그는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모습들을 보고 배우며 자란 이유로 가족들에게 있어서는 물론 남에게도 배려할 줄 아는 아량을 가질 수 있었다.

“가족은 물론이고 단체에 있어서도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두 아들에게도 소극적이기보다는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일에 용기를 가지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남을 위한 배려나 양보를 할 수 있는 마음은 가장 큰 용기니까요.”

들여다보면 사실 그가 한전에 들어올 수 있었던 계기도 가족 때문이었다. 부친의 형제 중 세 분이 한전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마침 지금까지 한전에서 단 두 번만을 시행했다는 직원 가족 특채가 그를 37년 동안 한전에 몸담게 한 것이다.

 

지중선사업처에서 근무하던 때가 가장 기억에 크게 남아

그런 과정으로 1970년 당시 우리나라 전력산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던 영월화력발전소에 입사해 한 3년간 터빈, 보일러실에서 근무하며 발전소 업무를 배웠다.

1973년부터 약 2년 동안은 직종을 변경해 제천 및 단양 변전소에서 변전업무를 보며 충청북도, 강원도 일부에 전기를 공급하는 154kV 변전소에서 선로의 유지·보수를 담당했다. 또 단양 변전소에서는 그 지역 시멘트 공장에 전기를 공급했고 경상북도에도 일원에 전기를 중계하는 등 그 지역사회에 이바지했다.

그 후, 동부지점 양평출장소에서 배전분야의 일을 하며 양평군 일대의 산간 오지지역 등 102개리에 전기를 공급하고 유지·보수 업무를 시행하기도 했다.

고 교사가 업무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은 1981년부터 약 10년간 몸담으며 근무한 지중선사업처(현재는 없음)에서의 일이다. 대도시의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됨에 따라 가공선의 포설이 한계에 도달해 기반 시설인 송전선로 확보의 필요성이 이슈가 되면서 부처가 신설된 것이다.

지중선사업처에서는 서울, 경기지역 154, 66, 22kV의 지중송전선로의 운영과 유지·보수 업무를 수행하며 지방의 지중송전선로의 유지·보수 작업을 지원하는 전국적인 활동영역의 업무였기 때문에 많은 지방을 순회해야 하는 출장의 연속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 교사는 지중선사업처에서 근무하던 그때가 가장 기억 속에 크게 남아있다. 가공배전의 일에서 지중송전을 운영하며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실행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된 건 물론, 전국의 사업장을 지원한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같이 고생했던 선후배들과 서로의 교감을 가질 수 있어서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37년의 세월이 행복뿐일까, 한때는 많은 출장으로 심신이 고달프기도 했고 문제가 발생하면 몇날 며칠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또한 지중 방식이 현재는 모두 관로식이지만 직매식으로 돼 있던 초기에는 굴착공사 등으로 인한 고장이 많이 발생해 원상복구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지금은 기계와 계측기 장비 등의 발달로 손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해결하고 다시 매설하는 일도 어려워 종종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그런가하면 저동에서는 쌍용빌딩의 오픈 루프 운전방식의 양전원이 모두 고장 나는 바람에 전체가 정전돼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동부지점 근무 시에는 골프장의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나오지 않아 잔디가 다 말라죽게 되자 다급해진 관계자로부터 해결을 요청하는 문서가 왔다. 출동해보니 땅 속 어디에선가 단락이 된 것으로 추정했지만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장비 등을 동원해 정확히 200m지점에서 문제가 발생된 것을 찾아 해결함으로서 관계자가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평생을 현장에서 보내고 말미에 후배를 가르친 것 가장 큰 보람

이제 뒤를 돌아보며 이런 지난 모든 일들이 생활의 한 과정이었다고 회상할 수 있는 때가 된 것일까. 정년을 1개월여 앞두고 그는 더욱 겸손해지고 정결해진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임하고 있는 듯 했다.

그동안 근무하면서 전기사정이 열악한 지역에 전원을 공급함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전기의 소중함을 알게 될 때, 그리고 지난 시절 가끔이라도 정전이 발생하면 투정처럼 불평하기도 하던 사람들이 이젠 무정전으로 편안해 질 때가 가장 큰 보람이다.

“요즘은 사회 전반적인 생활방식이 부와 관련돼 있지 않습니까. 가정에 충실하려 노력하며 지금까지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업무에 매달리다보니 부를 축적하는 데는 좀 소홀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노후와 가족을 생각해야 하는 가장의 마음이다.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교육원에 들어와 교육에 힘써온 지가 언 12년을 맞고 있다. 교육원의 일은 전국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지중 및 배전에 있어 공급과 운영에 따른 이론과 실무 그리고 유지·보수 등 전반에 걸친 대안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협력업체 등의 직원들에게 지중선로의 기술동향과 설비의 적용에 관한 이론과 실무를 전수함으로서 한전의 경향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고 제품의 적용과 개발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있다.

요즘은 교육원 뜰을 걸으며 산책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마도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직장을 떠나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저 소풍갔다 돌아온 동네처럼 금세 낯익게 되는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이가 들며 건강을 유지하는 일에 대해 더욱 신경을 쓰게 되는 건 당연하다. 강원도 시골에서 자란 덕에 주로 채식을 많이 하게 됐고 웬만한 거리는 걷고 뛰어다니며 자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단련이 되어 있는 몸이다.

하지만 타고 난 체력이라도 이제는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나이다. 평소 체력관리를 위해 고 교사는 각종 성인병의 원인이 되는 비만을 방지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소식하는 습관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일주일에 한 4번 정도는 헬스클럽을 찾아 1시간씩 충분히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대인관계와 사회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으로 대하려고 고 교사는 노력하고 있다. “긍정적인 생각이 건강에도 좋다”고 말하는 고 교사는 원래 모든 잡기에 능한 편이지만 요즘은 그동안 도무지 짬이 나지 않아 할 시간이 별로 없었던 바둑에 다시 손을 댔다.

군에 입대해 선배가 부르던 ‘축배의 노래’를 듣고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 꼭 저런 노래를 한 번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을 만큼 음악을 좋아하는 그는 학창시절부터 음악을 즐겨듣곤 했는데 지금까지도 이따금 좋아하는 음악에 푹 빠져 여유를 가져보기도 한다.

‘모든 것에 대한 아낌없는 배려’라는 평소의 인생관은 남에 대한 가장 큰 긍정일 것이다. 늘 근면성실을 목표로 검소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동안 수많은 교육생들 앞에서 떳떳했고 신념을 가지고 일하라고 얘기할 수 있다.

원래 새로운 지식에 대한 탐구심이 강해 사업소 등에서 근무할 때도 새로운 기술을 접할 때면 호기심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는데 교육원에 와서는 남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로서 더 많이 알아야 하기 때문에 수많은 관련서적을 구입해 보는 등 자기계발에 게을리 하지 않아 온 그다.

“그래서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일을 구할 때 돈을 벌기 쉽고 찾기 쉬워서 남들이 누구나 다 하려고 하는 일보다 혹시 남들이 경시하지만 자기가 꼭 해보고 싶은 일, 창의적인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 합니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메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지요. 인생은 결코 짧지가 않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가며 될 수 있으면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 좋은데 여기까지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짐을 지고 왔던가 하는 자괴심이 생기곤 합니다.”

한 직장에서 평생을 바쳐 일 해오며 후회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얼마나 행복인지 잘 알고 있는 백전노장의 고 교사는 후배들에게 누구나 항상 최선을 다 하지만 최선이 일의 완결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일이 제대로 안됐을 때도 생각해 대비하고 예방하는 것만이 더 큰 혼란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제 한전이 그동안의 기반시설 보강으로 투자단계에서 벗어나 번성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더 그렇다고 강조한다.

고 교사는 “평생을 현장에서 보내고 말미에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었다”며 수목원같이 나무가 울창한 교육원의 뜰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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