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지갑
빨간 지갑
  • EPJ
  • 승인 2012.05.0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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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콩트마당(45)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학원비 때문에 아침에 애들하고 실랑이를 하다 좀 늦게 집에서 나온 것이다.

지점이 있는 빌딩에 들어서자 이곳저곳에서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우리 영업소에 들어서니 오늘 있을 3차 마감을 독려하느라 소장이 한창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금살금 걸어가 내 자리에 앉았다.

설계사 생활을 한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내가 보험회사에 다니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남편이 운영하던 회사가 지난 연말에 큰 부도를 맞아 갑자기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이곳저곳에서 돈을 모으고 급히 부동산을 처분하여 발등의 불은 껐으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 셋의 학비와 생활비가 문제였다. 그 때문에 애들 학비라도 벌 생각으로 지난 2월에 우리 회사에 들어왔다.

조회가 끝나자마자 모두들 봉사용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도 과자봉지와 껌, 설문지, 청약서 용지 등을 가방에 챙겨 넣고 밖으로 나왔다. 과자봉지와 껌은 도무지 창피해서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늘 모아놨다가 퇴근할 때 집 근처에 있는 식당에 몽땅 줘버리곤 했었다.

이달 초, 우리 집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아는 이웃 사람이 연금보험 한 건 들어준 것 외에는 아직 아무런 실적도 올리지 못했다. 영업소 안에서는 교육받은 대로 한번 해보겠다고 굳게 결심을 해도 밖에만 나오면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엔 누구나 아는 사람을 찾아가 연고판매를 한다지만 나는 아는 사람을 찾아가기는커녕 행여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과 마주칠까봐 걱정을 하곤 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먼저 피했다.

갈 데가 없었다. 아침에 실랑이를 하던 생각이 나서 애들 학원비나 맞춰주려고 근처 은행에 들어갔다. 월말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청구서 용지를 꺼내들고 쓸 자리를 찾았다.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 옆에 비집고 들어갔다. 유리판 위에 자주색 코트가 걸쳐져 있었다.

나는 코트를 살짝 밀치고 그 자리에 청구서를 놓았다. 계좌번호와 금액을 쓰고 막 비밀번호를 기재하려는 순간, 바로 옆에서 젊은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아줌마. 여기 있던 빨간 지갑 어떻게 했어요?”

좀 시끌시끌하던 은행 안이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바로 옆에 있던 여자가 두 손을 허리에 척 올린 채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반문했다.

“지갑이라니, 무슨 지갑이 어디 있었단 말예요?”
“아이 참, 기가 막혀. 아줌마가 왔을 때 이 코트 위에 있었잖아요! 아줌마 외에는 코트를 건드린 사람이 없어요!”

코트를 살짝 밀쳤을 때 지갑을 본 기억은 없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여자가 다시 핏대를 올리며 말했다.

“가져가 봤자 지갑 안에 돈은 한 푼도 없어요. 주민등록증이랑 카드밖에 없어요. 빨리 내놔요.”
완전히 도둑취급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진짜 도둑이 되고 말 것 같아 나도 소리를 질렀다.

“이봐, 말조심해. 어디서 잃어버리고 누굴 도둑 취급하는 거야!”
“그럼 저 가방 좀 볼 수 있을까요?”

그 여자는 내 두둑한 가방을 의심하고 있었다. 주위사람들이 가방 앞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창피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가방의 지퍼를 열고 그 안의 내용물을 유리판 위에 쏟아놓았다.

보험청약서 용지와 과자봉지, 껌, 화장품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모두들 껌 하나와 사탕 두 개씩을 투명비닐 속에 넣어놓은 과자봉지에 눈이 가는 것 같았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웬 과자봉지를 저렇게 많이 넣어 다니지?’하는 눈치였다.

‘보험아줌마 아냐?’하는 소리도 뒤에서 들려왔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그 여자는 팔짱을 낀 채 모두들 보란 듯 ‘아이 참, 기가 막혀!’를 연발하고 있었다.

나는 창피해서 과자봉지랑 청약서 용지들을 도로 가방에 쑤셔 넣었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지갑은 구경도 못했는데 코트를 조금 건드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새파란 젊은 여자한테 도둑으로 몰려 수모를 당하다니….

그때 제복을 입은 청원경찰이 다가왔다. 나는 구세주를 만난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여기 있는 사람들 못 나가게 빨리 문을 닫아요. 그리고 경찰을 불러요.”

그러나 청원경찰은 대답은 않고 내 가방을 다시 열어보라고 했다. 나는 가방에 든 내용물을 또다시 유리판 위에 쏟아놓았다. 그는 이것저것 들쳐보더니 ‘아줌마, 이 과자는 뭐요?’하고 물었다.

“그래요. 나 보험아줌마예요. 그게 뭐 잘못 되었어요?”

나는 악을 썼다. 그리고는 다시 내용물을 가방에 주워 담았다. 창피해서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냥 나갈 수가 없었다. 범인을 잡아야 도둑누명을 벗고 떳떳이 나갈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청원경찰이 유리판 아래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저거 뭐야?’하며 뒤쪽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빨간 색깔이 얼핏 보였다. 그 아저씨가 밑으로 들어가 그것을 주워들었다.

“맞아요. 아저씨.”

지갑을 받아든 그 여자가 나를 쳐다보며 ‘미안해요 아줌마.’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누명을 벗은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나는 그 여자의 뒷덜미에다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이봐, 새댁. 지갑 찾았으니 보험이나 하나 들어!”

나도 모르게 막혀있던 말문이 터졌다. 속이 후련했다. 이때까지 나 자신을 옥죄었던 자존심의 허물이 걷혀지고 있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 어디를 가더라도 떳떳하게 가방을 열고 과자봉지를 나눠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당당하게 밖으로 걸어 나왔다.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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