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탄 사나이
총알탄 사나이
  • EPJ
  • 승인 2012.04.0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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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이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우리 집안의 4대째 외아들이다.

먼저 딸을 낳았기 때문에, 정석이를 가졌을 때 또 딸이면 어떡하나 싶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딸 정연이를 낳았을 때는 꿈쩍도 않으시던 시할아버지께서, 정석이를 낳았을 때는 “이제 조상들 뵈올 면목이 섰다”며 여든이 다 된 노구(老軀)를 이끌고 상경하셨을 정도였으니.

사내아이가 있는 집이 다 그렇듯이, 우리 집에도 온통 로봇 총 탱크 같은 장난감이 널려있고 집 안도 여간 소란스러운 게 아니다. 게다가 가전제품 가구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온전하게 남아있는 게 없다. 밖에 나가서 놀라고 쫓아내면 이웃집 아이와 싸우고 씩씩거리고 들어오거나 얻어터져서 울면서 들어오기가 일쑤였다.

정석이에 비하면 정연이는 거저 키운 거나 다름없었다. 간혹 딸만 둘 낳은 친구 집에 갔을 때, 집 안이 깨끗하고 조용해서 부러운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슨 블록 하나와 인형 몇 개로 두 딸을 다 키웠다는 얘기를 듣고는 더욱 그랬다.

아무튼, 우리집안의 대들보 정석이는 잘 먹고 잘 놀고 그럭저럭 잘 자라서 지난 3월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이제 한 시름 놓았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며칠 전, 늘 그랬듯이 학교 갔다 와서 책가방을 던져놓고 놀러 나가더니 얼마 안 있어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갑자기 한쪽 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머리를 움직이면 소리가 나고 가만히 있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단다.
친구들과 총싸움을 하다가 귀에 총알이 들어갔단다. 총알이 어떤 거냐고 물었더니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그만 알갱이란다.

귓속을 보니 하얀 총알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꺼내려고 귀이개로 쑤시다가 안으로 더 들어가고 말았다. 이젠 잘 보이지도 않았다. 겁이 났다. 잘못 건드리면 더 큰 일이 날 것 같았다. 저녁에 남편에게 얘기를 하니 왜 병원에 가지 않았느냐고 호통이었다.

이튿날 오후, 정석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버스를 타고 여의도에 있는 한 유명한 병원을 찾아갔다.

“엄마, 무슨 과 가야돼?”

병원 창구에서 접수를 하고 있는데 정석이가 물었다. 글을 좀 배웠다고(?) 아까 오면서 온갖 간판을 다 읽어대더니, 병원 안내판을 보고는 또 발동이 걸린 것이다.

“응, 이비인후과. 어딘지 찾아봐.”

접수를 마치고 나니, 벌써 찾았다며 정석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이비인후과’ 라는 간판 밑에 ‘의학박사 윤O수’라는 명찰이 걸려 있었다. 30분쯤 기다린 끝에 차례가 되었다. 삼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의사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상황설명을 하니 조그만 손전등으로 귓속을 비춰보고는 곧 처방을 내렸다.

“수술해야 합니다. 바로 입원시키세요. 마취를 하고 귀를 약간 절개해서 이물질을 꺼내야 합니다. 곪으면 큰일이니 속히 해야 합니다.”

수술이라는 말을 듣고 파르르 떠는 나를 보며, 의사가 위로하듯 덧붙였다.
“내일 바로 수술합시다. 2, 3일만 입원하면 됩니다. 간단한 수술이니 크게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나는 쓰러질 것 같은 의식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겨우 모기소리 만하게 대답했다.
“저녁에 애 아빠하고 의논해서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병원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정석이는 아무 것도 모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또 간판을 읽어대고 있었다. 그러더니 과일 노점상 앞을 지나면서 갑자기 수박이 먹고 싶다고 투정을 했다.

아직 제 철이 아니라서 비싼 줄 알지만 정석이가 측은해서 큰마음 먹고 한 통을 샀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서도 마음은 계속 병원에 가있었다. ‘입원, 마취, 수술….’ 아까 의사가 하던 말이 자꾸만 머리에서 맴돌았다. ‘이 어린 것이….’ 정석이를 쳐다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 왜 그래? 어디 아파?”
나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대답 대신 정석이의 손을 꼭 쥐었다. 동네 골목시장 입구에서 버스를 내렸다. 정석이가 좋아하는 과일 샐러드를 해주려고 과일이랑 찬거리를 사고 있는데 등 뒤에서 정석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여기도 이비인후과가 있어.”
돌아보니 정석이가 손가락으로 한 상가건물 2층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O숙 이비인후과의원’ 이라고 써진 간판이 보였다. 한번 가보자. 나는 정석이를 앞세우고 2층으로 올라갔다. 대기실은 텅 비어 있었고 잡지를 보고 있던 간호사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십대 중반쯤의 여의사가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귀에 장난감 총알이 들어갔다고 내가 설명을 하자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총알탄 사나이로구먼!”

의사가 정석이를 진료의자에 앉히고 만년필 같은 손전등으로 귓속을 비추었다. 그리고는 아주 가늘게 생긴 핀셋을 가지고 왔다. 의사가 정석이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자,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옳지, 조금만 참아. 이놈 아주 씩씩하구나. 갈 때 엄마한테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해. 옳지.”
정석이가 간간이 비명을 지르고, 의사가 진땀을 흘리며 씨름한지 몇 분이나 흘렀을까?
“자, 됐다. 이거 봐!”

의사가 꺼낸 총알을 정석이에게 보이고, 다시 내게 내밀었다. 정석이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벌써 히히거리고 있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까 갔던 병원은 도대체 어찌된 것인가…?’ 갑자기 이 여의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거푸 절을 했다.

진료비는 받지 않겠다며 그냥 가란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아까 샀던 수박을 의사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의사와 간호사를 뒤로하고 의원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수박이 아까운 듯 자꾸 뒤돌아보는 정석이의 손을 잡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가다가 시장에서 제일 큰 수박 사줄게.”
저만큼 서녘으로 기울어진 햇살이 눈부시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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