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백과 여심(女心)
핸드백과 여심(女心)
  • EPJ
  • 승인 2011.12.09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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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 (40)

초등학교 3학년인 작은 딸 혜진이에게는 애지중지하는 것이 하나 있다. 작년 가을, 부산에 사는 제 막내 이모가 사준 조그만 손가방이다. 귀엽고 앙증스럽게 생긴데다 기다란 끈이 달려 있어 어깨에 걸치도록 되어있다. 분홍색으로 고르더란다. 제 언니 것은 보라색으로 골라주고.

5학년인 언니는 좀 커서 그런지 옷장에 걸어놓았다가 어디 갈 때나 가끔 들고 가는 정도인데, 혜진이는 유별나다. 학교에 갈 때 책가방과 보조가방에다 무슨 준비물까지, 들고 가는 것이 서너 가지씩이나 되는 날도 핸드백은 빼놓지 않고 걸치고 간다.

학교에 갔다 와서 피아노학원에 갈 때도, 놀이터에 나갈 때도, 어떤 때는 집에서 화장실 갈 때도 들고 간다. 잠잘 때 빼놓고는 거의 어깨에 걸치고 있다. 그 안에 무슨 보물이 들어있는지.

지난 설날연휴 때 고향 형님 댁에 갔다가, 차례를 지낸 후 어릴 때 살던 고향 마을 집안 어른들과 읍내의 여러 친척들에게 세배하러 다니다가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 마지막으로 제 외가에 갔을 때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 핸드백이 없어졌다는 거였다.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노는 데 얼마나 정신이 팔렸던지 그 애지중지하던 핸드백을 어느 집에 두고 온 것이다.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잘 생각해보라고 했더니 고향 마을 작은할머니 댁에 두고 온 것 같다고 했다. 내일 서울에 올라간다고 인사까지 하고 나온 터에 다시 그 집에 가기가 좀 뭣해서 더 예쁜 것 사 주겠다고 꼬셔보았다. 필요 없단다.

그 안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느냐고 물었더니 주섬주섬 읊어대는 것이 대충 이러했다. 여기저기서 받은 세뱃돈을 넣어놓은 노란색 지갑, 친구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 꽃무늬 메모지, 조그만 손거울, 자전거 열쇠, 그리고 미니 볼펜 세트….

결국, 어둑어둑해질 무렵 차를 몰고 다시 작은할머니댁에 가서 그 핸드백을 찾아오고서야 그 소동은 해결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귀경길에 올랐다.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추풍령 가까이 오니 차가 밀리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눈이 오기 시작했다. 앞 창문에 부딪치는 눈들은 윈도우 브러쉬에 밀려 속절없이 스러지고 있었다. 눈 때문에 차들이 모두 거북이 걸음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는 졸리는지 눈을 감고 있었고, 뒷좌석에는 혜진이가 핸드백을 걸친 채 언니와 뒤엉켜 잠들어 있었다.

오래 전, 군에 있을 때 편지를 주고받던 여자가 있었다. 고향마을에서 함께 자란 여자였다. 휴가 나왔다가 대학생이 된 그녀를 동네에서 만났고, 귀대한 후 그녀가 다니는 학교로 편지를 썼다. 이후 군생활 내내 그 여자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을 키워갔다.

다음해 봄, 두 번째 휴가를 나왔을 때 나는 부산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우리는 함께 해운대 백사장을 걸었다. 그때 내가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었지, 아마.

내가 제대를 하고 고향에 왔을 때 그녀도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집에 와있었다. 우리는 동네사람들의 눈을 피해 올빼미처럼 밤에 만났다. 뒷산 기슭에 앉아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밤늦도록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달빛을 벗 삼아 과수원길을 함께 걷기도 했다. 어떤 날은 뒷산 너머 십리가 넘는 저수지 옆길을 손잡고 한 바퀴 돌아오기도 했다.

서로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안타까워하던 우리는 드디어 올빼미데이트를 청산하고 문명세계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녀가 날을 잡아 연락해 주기로 했다. 며칠 뒤 그녀로부터 쪽지가 왔다.

내일 만나.
오후 2시, 부산역 앞 행운다방
달빛도 풀벌레 소리도 잊혀진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해변을 걸으며
거기 무언가를 심어두고 싶다.
조용한 카페에서 찻잔을 기울이며
잊혀지지 않을 얘기 나누고 싶다.

그날, 우리는 영화관에서 오드리 헵번과 헨리 폰다가 나오는 ‘전쟁과 평화’를 보았다. 주제곡 ‘나타샤 왈츠’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곡이 되었다. 저녁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타고 다대포로 향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넘실대는 파도를 물들이고 있었다. 우리는 밤늦도록 백사장을 오가며 수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다시 시내로 들어와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 2층집 여관방 창문으로 달빛이 교교히 흘러들고 있었다. 우리는 창문 앞에 나란히 꿇어앉아 달님 앞에서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기원했다. 그 여자의 핸드백이 눈에 띄었다. 그 속이 궁금했다.

“이 핸드백 열어봐도 돼?”
“응, 보고 싶으면 봐.”

내가 처음 열어본 핸드백, 여자가 핸드백 속을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속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는 것은 그 훨씬 이후에나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함께 자리에 누웠고 그 여자는 내 팔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다.

내가 처음 핸드백을 열어보고 싶었고, 내게 아무 거리낌 없이 핸드백을 열어준 그 여자와는 결국 헤어졌다.
“언니, 서울이다. 집에 다 왔어. 빨리 일어나.”

차가 광명대교에 들어설 무렵, 언제 일어났는지 혜진이가 큰소리로 말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은 그쳐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캄캄한 밤이었다.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연속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열심히 핸드백을 어깨에 걸치고 다니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꼬마에게 핸드백 좀 보여 달라고 했다.
“안 돼!”

나는 핸드백을 보자고 한 여자에게 처음으로 딱지를 맞았다. 그 상처(?)로 인해 한동안 그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며칠 후 그 아이가 핸드백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 등에 붙어서 치근거렸다.
“아빠, 내 핸드백 보여 줄까?”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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