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이름의 위대한 발견”
“가족이란 이름의 위대한 발견”
  • 빅정필 기자
  • 승인 2007.02.28 2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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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재발견] 미스 리틀 선샤인

영화가 넘쳐나고 정보가 범람하는 요즘, 우리는 이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 어떤 영화를 봐야 기회비용 대비 생산성이 좋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때문에 영화를 볼 때 미리 정보를 섭렵하고 어느 정도의 기대상한선을 정해놓은 후에 영화를 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화들은 우리가 기대했던 딱 그만큼만 보여주곤 한다.
 
그러나 가끔씩 눈 먼 돈을 주운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영화가 있다. 영화에 대한 별다른 사전 지식 없이 느낌만으로 선택했지만 의외의 매력이 넘쳐 우리를 기쁘게 하는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분명히 그런 영화이다.

인생이 주는 시련에 살아가는 게 아니라 견뎌나간다는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가족이 있다. 자신의 9단계인가 먼가 하는 이론이 마치 손자의 병법이나 되는 양 착각하고 한탕을 노리는 쫌생이 아버지, 인생의 절반을 섹스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을 마약으로 탕진하는 에피쿠로스의 절대 신봉자 할아버지, 진절머리 나는 생활의 반복에 어느 새 화장을 잃어버리고 안드로메다에서 온 가족부양 로봇이 되어버린 어머니, 짜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을 한 게 아니라 말 따윈 하지 말라고 한 양 말문을 닫아버리고 세상을 혐오하는 니체주의자 오빠, 유대인 특유의 잘 돌아가는 뇌 구조를 가진 스마트 브레인이지만 또한 유대인 특유의 피해의식에 자살을 기도하는 삼촌, 뭔 아이스크림을 그리도 먹었는지 올챙이처럼 똥배가 볼록해서 도무지 ’미스 리틀 선샤인’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과대망상 올리브’까지……. 참 어디하나 잘난 구석 없는 별 볼일 없는 가족이다.

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참 지지리도 궁상맞게 산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런 가족 구성원의 면면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영화 초반은 조금 불편하다. 이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감추고 싶었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들의 여정이 계속될수록 우리는 그들에게 알 수 없는 애정을 가지게 된다. 이 또한 그들의 ‘궁상맞음’이 다른 영화 속의 멋지고 잘생긴 인물들이 보여주지 못한, 포장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그들의 모습에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하고 뭐 하나라도 이 가족들에게 즐거움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이들이 가는 길은 마냥 험난하고 되는 것 하나 없다. 옆에 앉아 있는 서로가 원수 같고 자기 자신이 한심하며 모든 게 다 엉망이다. 하지만 그들은 말한다. 가족이니까 함께 가자고, 가족이니까 서로를 보살펴 줘야 한다고…….

‘가족’이라는 흔한 단어, 당신에게는 항상 따뜻하게 들리는가? 솔직히 가끔씩은 자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올가미처럼 느껴지지는 않는가? 어떤 딸은 “공주님~공주님~”하고 키워 놓았더니 난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며 맘에 비수를 꽂고, 어떤 아들은 “왕자님~왕자님~”하고 키워 놓았더니 내 인생은 아빠 때문에 다 망쳤노라고 문을 쾅 닫는다. 또 어떤 이들은 아버지의 술과 폭력에, 어머니의 사치와 외도에 평생을 짐차처럼 무겁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한다. 가족이니까 함께 가자고, 가족이니까 서로를 보살펴 줘야 한다고…….

가만히 돌아보면 누구하나 딱히 잘난 인간 없다. 다 거기서 거기다. 갑남을녀, 필부필부, 장삼이사일 뿐이다. 부자든, 가난뱅이든 사는 모습은 어디서나 다 비슷비슷하고 어떤 부분은 부끄럽기 마련이다.

감독은 마치 옆집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이 가족을 통해 우리끼리 “이놈아!”, “이년아!” 하더라도 가족이라는 끈과 울타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끈을 일부러 놓지 않는 한, 그 울타리를 억지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서로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이라는 공간 안에 있는 것이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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