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무서워
밤이 무서워
  • EPJ
  • 승인 2011.10.1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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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38)

아침에 눈을 뜨니 아랫배가 묵직했다. 뱃속에 가스가 꽉 찬 것 같았다. 현관에 있는 신문을 주워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며칠 계속 변비증세가 있더니 벌써 사흘째 변을 보지 못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10여 분을 실랑이 끝에 뭉뚝한 변이 한 덩어리 나왔다. 이어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변기통이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어지러웠다. 겁이 덜컥 났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아내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며 입원을 하란다. 나는 회사에 전화를 걸어 급한 일을 지시해놓고 입원수속을 밟았다. 몇 가지 검사를 하고 CT촬영도 했다. 결과는 이틀 후에 나온단다.

점심 때 쯤 다시 화장실을 가니 이번엔 설사가 쏟아졌다. 또 검붉은 피가 변에 묻어나왔다. 병원에서의 첫날밤, 잠이 오지 않았다. 4년 전에 대장암으로 죽은 영호 생각이 났다. 영호와 증세가 비슷한 것 같았다. 아랫배가 살살 아프고 변비에다 설사, 그리고 혈변….

영호는 가장 친한 대학 친구였다. 대학 입학식 날 그를 만나 2년 동안 쭉 단짝으로 지냈다. 나는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를 했고 그는 ROTC에 지원했다. 내가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3학년에 복학할 무렵 그는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내가 4학년 가을 Y철강에 합격해 영업부에 배치가 되었을 때, 그는 6월말에 전역해 벌써 우리 회사 자재부에 입사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인연은 또다시 이어졌다.

그에게는 전에 없던 기벽(奇癖)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매일 퇴근 때 지하철역 입구에서 혼자 소주 반병을 마시는 것이었다. 빈속에 매일 그렇게 소주를 마시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군대생활 할 때부터 생긴 습관이란다. 뱃속이 비면 늘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는데 소주를 마시면 신기하게도 통증이 싹 가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유일한 낙이라고 했다.

2년이 지나 다시 가을이 무르익고 있었다. 퇴근 무렵 회사로 들어와 서류정리를 하고 있는데 영호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영호가 3일 전에 병원에 입원했다는 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며칠 동안 회사에서 그를 보지 못한 것 같았는데….

병실에 들어서니 영호는 링거액을 꽂은 채 잠이 들어있었고 그의 아내가 옆에 멍하게 앉아있었다. 이미 눈물도 말라버린 듯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그의 아내를 복도로 불러내서 물었다. 며칠 동안 계속 혈변을 쏟더란다. 부랴부랴 입원해서 사진을 찍고 검사를 했단다. 어제 검사결과가 나왔는데 대장암 말기란다. 암세포가 대장은 물론 소장, 직장에까지 퍼져서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란다. 길어야 6개월 아니면 4개월 정도밖에 살지 못한단다.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 금방 잠에서 깨어난 영호가 링거액을 꽂은 채 내 손을 잡았다.

“윤섭아, 나 이제 끝났나봐. 근 5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빈속에 소주를 마셔댔으니. 내년 봄에 새 아파트에 입주하는데 새 집에서 하룻밤만 자고 죽었으면 한이 없겠다. 윤섭이 넌 절대로 술 많이 먹지 마라.”

그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의지가 있어야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며 힘을 내라고 말했다. 그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수일 내로 또 오겠다고 말하고 병실을 나왔다. 몇 번 더 그를 찾아갔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것은 입원한 지 석 달이 조금 지나서였다. 그는 완전히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수척해 있었다. 교사인 그의 아내는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병원을 지키고 있었다.

영호보다 그의 아내가 더 안스러웠다. 나는 오늘밤은 내가 병실을 지키겠다고 말하고 그의 아내를 기어코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내가 돌아가자 영호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밤이 무서워….”

그는 밤이 무섭다고 했다. 낮에는 사람들이 있고 또 통증이 심하면 의사가 와서 진통제 주사도 놓아주는데 밤에 모두들 잠들고 나면 혼자 깨어있단다. ‘그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는 꿈도 자주 꾸고….’

결국 그는 입원한 지 4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고향의 공원묘지에 그를 묻었다. 그가 간 지 4년이 흘렀다. 나는 지난 봄에 영업과장을 끝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철강관련 사업체를 차렸다.

그동안은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밤늦게까지 술 마시는 날들이 많아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속이 불편했다. 그러더니 결국 혈변을 쏟고….

입원한 지 이틀째 밤이 되었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은 영호의 증상과 비슷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대장암? 4개월이나 6개월? 밤이 무섭다던 영호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날이 새면 검사결과가 나온다. 나는 거의 뜬눈으로 병원에서의 두 번째 밤을 보냈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10시가 가까워오자 담당의사가 들어왔다. 나는 의사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치질입니다. 치질에는 내치와 외치의 두 가지가 있는데 선생님은 내치입니다. 내치는 항문 속에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대변 때 혈관이 터져서 혈변이 나오게 됩니다. 큰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간단한 수술로 깨끗이 없앨 수 있습니다.”

“예, 치질요? 히히히 고맙습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실성한 사람처럼 자꾸만 히히거리고 있었다.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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