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명품, 장인의 손길로 되살아나다”
“망가진 명품, 장인의 손길로 되살아나다”
  • 박정필 기자
  • 승인 2007.02.28 1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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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 & 人] 50년 장인정신 ‘명동스타사’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 5번 출구로 나가 5분정도 걸어가면 명동입구 오른편에 ‘명동스타사’라는 주황색 간판이 보인다. 6.25동란의 폐허 속, 명품수선이라는 개념조차 명확치 않던 그 시절부터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손때 묻은 핸드백과 구두 등을 수선해오고 있는 명동 속의 명품, 명동스타사를 찾았다.

가게 뒤쪽에 자리 잡은 작업실로 올라가면 코끝으로 진하게 느껴지는 본드냄새, 묵은 가죽냄새와 함께 가위질 소리,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익숙하게 녹아있다. 각종 가죽 천들과 실타래들이 잔뜩 쌓여있는, 좀 어지러운 듯한 8평 남짓 작업실 구석구석에 세월의 손때가 보이는 듯하다. 정밀한 작업을 위해 조도를 한껏 높인 형광등 아래로 오래된 핸드백을 한땀한땀 기워나가는 기술자들의 세심한 정성이 느껴지고, 끌처럼 생긴 칼로 두꺼운 가죽을 거침없이 잘라내는 한 기술자의 모습에서 반평생을 기술에 몸 바친 장인의 익숙함이 묻어난다.
 
명품을 가장 명품답게, 오리지널 수선의 자부심

김병양 사장(71)은 젊은 시절 서울로 올라와 1965년 당시 친척이 경영하던 명동스타사를 인수했다. 3평 남짓한 골방 한쪽에서 그가 구두 뒷굽을 다시 대고 구겨진 가죽에 광을 낼 때면 옆에 앉은 부인은 온종일 바느질을 하면서 가게를 꾸려 나갔다. 지금이야 재료들을 다 수입해서 쓰고 있지만 당시에는 수선에 필요한 재료들이 충분히 들어오지 않던 때라 재료를 구하는 것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가 처음 일 시작했던 그때는 루이비통 가방 같은 것도 지금 같지 않아서 지퍼가 자주 고장 났어. 그러면 안식구가 일일이 송곳을 가지고 그 실을 떠서 낚아치기해서 감고 그렇게 다시 또 똑같은 색의 실을 만드는 식으로 일을 했다고. 그럴 때면 지퍼 하나를 고치는 것도 하루 종일 걸리고 그랬지.”

그렇게 김 사장 부부는 명품을 오리지널 그대로 고치는 기술에서는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게를 꾸려왔다. 명품을 가장 명품답게 원판과 똑같이 고쳐내는 것, 그것이 김 사장 내외의 과제였고 손보기 어려운 제품이 있을 때에는 밤이 새도록 기술자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그런 장인정신과 노하우가 쌓여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지금의 명동스타사가 된 것이다.

김병양 사장은 이제 작업 일선에서 물러나 가게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가게가 바쁠 때면 짬을 내서 돕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사다주곤 하지만 이제 명동스타사의 미래는 현재 일하는 전문 기술자들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 기술자들은 사위인 조길형(43) 부장이 수소문해서 스카우트한 이 방면의 최고의 전문가들이다.

“우리야 뭐 워낙 한자리에서 오래되고 하니까 전통이 있고, 기술자들도 경륜이 있는데다 일도 열심히 하니까 손님이 원하는 대로 일 확실히 한다는 거지 뭐. 그러다보니 손님들이 인정 해줘서 멀리 지방에서 찾아오기도 하고, 일본 사람들도 단골손님이 많아. 가끔씩 외국인을 인솔해온 여행 가이드들이 가방 여기서 고치라고 소개해 주기도 하더라고.”

그렇게 찾아온 손님들이 자신들이 고친 물건에 만족할 때가 가장 보람 있다는 김 사장은 은근한 자랑을 이어나간다. 자기네들 손을 거치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 기자가 취재 중에 본 바로도 그런 자신감은 단순한 자만심이 아니었다.

아무리 오래된 물건이라도 숙련된 기술자의 손을 거치면 새 물건처럼 변신했고, 촌스럽고 유행이 지난 숄더백이 분해되고 다시 재단되어 최신 트렌드에 맞는 토트백이나 파우치 백으로 환생하기도 했다. 물론 본래의 품위를 그대로 간직한 ‘명품 재탄생’임은 당연하다.

화재로 잃은 용기, 손님들 격려로 다시금 ‘벌떡’

명동스타사가 항상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건물이 오래되다 보니 전기 누전으로 인해 두 번이나 불이 났었다. 특히 10여 년 전 큰 불이 나 손님들의 물건이 다 타버렸을 때에는 크게 낙담하기도 했다고.

워낙 가격이 비싼 명품들이라 주위 사람들에게 손을 벌려가면서 손님들의 물건을 보상해 줘야 했을 때는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오래 알고 지낸 단골손님들의 힘내라는 격려와 보살핌에 다시금 힘내서 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사정을 이해하고 보상금 한 푼 받지 않은 손님들도 적지 않았다면서 다시금 고마움이 가득담긴 표정을 지어보이는 김병양 사장의 얼굴에 당시의 회한이 묻어보였다.

오랫동안 일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들이 오죽 많았을까? 김병양 사장은 까다로운 손님들과 얽힌 기억들을 꺼내 놓았다.

“대하기 힘든 손님들도 있지. 한번은 분명히 자기 것인데 물건이 바뀌었다고 한참을 우기는 손님 때문에 경찰서까지 간적도 있고, 때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물건이 고쳐지지 않았다고 역정을 내는 손님들도 있었지. 그럴 때면 손님이 해달라는 대로 몇 번이고 재수선을 해서 고쳐주곤 해. 그러면 손님들도 만족하고 다음에 또 우리 집에 와서 물건 맡기고 그러지.”

“박물관에 내가 고친 악어백 있는 걸 보고 흐뭇”

아주 특별한 기억들도 있다. 김 사장은 영화배우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신영균 씨가 제주도에 마련한 박물관(신영영화박물관)에 자신이 예전에 수선했던 악어가죽 가방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감회가 새로웠다고 회고한다. 그 가방은 오랫동안 단골이었던 영화배우 황정순 씨의 소장품이었다.

이처럼 김 사장의 고객 리스트에는 황정순 씨 이외에도  김지미 씨, 강부자 씨를 비롯해 요즘에는 가수 하춘하 씨가 단골이고 백선엽 장군과는 내외분이 친구처럼 지내신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기사를 보내 구두 수선을 맡긴 것을 나중에 알고 매우 놀랐던 기억도 있다고.

1953년 당시 3평으로 시작했던 가게는 현재 17명의 기술자를 가진 작은 기업이 되었다. 얼마 후에는 가게도 더 확장하고 기술자들도 2명 더 늘릴 계획이다. 알음알음으로 띄엄띄엄 찾아오던 손님들에게 입소문이 나서 하루에도 수십 통의 문의전화가 오고 매장으로 방문해 자신의 물건을 맡기는 손님도 끊이질 않는다. 게다가 최근에는 주변 명품관과 직접 계약을 맺어 일거리를 하청 받고 있으며 인터넷 홈페이지(www.myungdongsa.co.kr)도 만들었다.

이처럼 명동스타사를 명품으로 키운 김병양 사장의 바람은 의외로 소박하다. “난 뭐 별다른 것 없어. 내 나이 일흔 둘에 이렇게 방송도 타고 잡지에서 취재도 오니까 너무 고맙지. 밥 먹고 살 정도로 돈도 모았으니 별달리 바랄게 뭐가 있겠어. 난 지금 100%야 100%. 다만 4남매가 있는데 애들이 학교 다닐 때 우리 둘 다 일에 바빠서 신경 많이 못쓰고 제대로 못 가르쳤던 게 미안하고, 내 옆에서 고생하느라 허리 아파 누워있는 안식구한테 좀 미안하고 그래. 그리고 뭐 우리 막내(차남 신규 씨, 39)랑 지금 가게 살림해주는 우리 사위랑 서로 잘해서 앞으로 이대로만 계속 나갔으면 좋겠어. 50년은 넘었으니까 100년, 200년 계속 이어나간다면 더 바랄게 없지.”

끝으로 김병양 사장은 “명품을 명품답게 쓰는 것, 그것이 명품을 쓰는 사람들 스스로가 명품이 되는 길”이라며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예전에는 정말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좋은 물건을 사서 소중히 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즘 일부 젊은이들이 분수에 넘치게 명품만 좇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는 명품은 사치품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결과물이라며 다시한번 힘주어 명품을 명품답게 쓸 것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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