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백수의 하루
어느 백수의 하루
  • EPJ
  • 승인 2011.06.09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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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벽에 걸린 시계가 막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아침에 아내가 출근하자마자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던 생각이 났다. 벌떡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 냉수 한 컵을 따라 마셨다.

정신이 좀 맑아졌다. 아내가 나가면서 ‘세탁기 돌려놨으니 세탁이 끝나거든 빨래 널어요.’ 하던 말이 생각났다. 담배를 찾았다. 탁자 위에 있는 담뱃갑은 비어 있었다.
‘제기랄’ 나는 투덜대며 뒷 베란다로 가서 세탁기의 뚜껑을 열었다. 세탁물들이 원통 가장자리에 엉켜 있었다. 세숫대야에 담아 앞 베란다로 들고 왔다.

대학 4학년 때 사법고시 1차 시험에 붙은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1년 후에 있을 2차 시험을 준비하느라 취직을 포기하고 오직 고시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아 몇 년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결국 그 친구는 여교사와 결혼, 아파트 1층에 세를 얻어 고시공부를 계속했다. 아내가 출근하고 나면 세탁기에서 세탁물을 꺼내 앞 베란다에 널곤 했는데 베란다 너머로 이웃집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칠 때가 가장 곤혹스럽다고 했다.

갑자기 그 친구가 하던 말이 생각이 났다. 우리 집은 5층 아파트의 꼭대기 층이라 밖에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칠 가능성이 없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1층 현관 앞에서 아줌마 둘이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세탁물들을 건조대에 널기 시작했다. 반쯤 널었을 때 바로 앞 동에서 창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가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또렷하게 보이진 않았으나 30대쯤 되는 젊은 주부 같았다. 머리는 묶어서 올렸고…. 나는 후다닥 집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지은 죄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럴까…?

또 다시 담배 생각이 났다.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려고 해도 모두 도시락을 싸 가지고 학교에 갔으니 아직 돌아올 때가 멀었다. 앞 동 여자가 보이지 않자 나는 다시 살그머니 베란다로 나가 빨래를 마저 널었다.

‘에이, 안되겠다. 담배 사러 가야겠다.’ 나는 간단히 세수만 하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에서 대낮에 이웃 아주머니들의 눈에 띄는 게 얼마나 싫은지는 백수생활을 해 본 사람은 알리라.
다행히 아파트 앞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상가 슈퍼에서 담배 한 보루를 샀다. 슈퍼 옆에 있는 가판대에서 벼룩신문을 뽑아들고 집으로 오는데 1층 현관 입구에 매직펜으로 쓴 방문(榜文)이 붙어 있었다.

                       

 강아지를 찾습니다
          견 종 : 치와와(10개월)
          색 상 : 짙은 노란색
          특 징 : 눈이 크고 튀어나왔으며 네 발목이 흰색임
                 * 위 강아지를 본 사람은 687-45×7로 연락 바람
                   찾아주시는 분에게는 후사하겠음.

집에 돌아오자마자 담배를 피워 물고 신문을 펴들었다. 내가 제일 흥미 있게 보는 것은 TV프로 안내와 스포츠면의 프로야구 기사이다. 위성TV에서 매일 프로야구 중계를 해주는 사실을 알고부터 몇 번 아내에게 가입신청을 하자고 졸랐으나 영 반응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저질러놓고 보자.’ 큰마음 먹고 위성TV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요즘 홍보기간이라 가입비는 면제이고 한 달에 1만2천 원만 내면 된단다. 신청을 할까 하다가 아내의 찡그린 인상이 떠올라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벼룩신문을 펼쳐들었다. 사원모집 광고가 실려 있는 면을 찾았다. 지난 연말, 부장과 대판 싸우고 직장을 그만둔 이후 쭉 집에 눌러앉아 있으면서 허구한 날 벼룩신문의 사원모집 란을 독파해 왔었다.
큼지막하게 사원모집을 실은 회사는 크고 탄탄한 회사지만 나이나 경력제한 때문에 서류를 낼 자격조차 없었다. 조그맣게 난 두 줄짜리 광고란을 주로 본다. 매일 그러다 보니 광고를 보는 눈도 세련돼졌다.
40대 경력자, 홍보요원 어쩌고 하면서 월급으로 몇 백만 원 준다고 하는 광고는 대부분 정수기 혹은 그 비슷한 상품의 영업사원을 뽑는 거다. 이력서 들고 몇 번 갔다 온 경험에서 우러나온 결론이다.

초인종 소리가 났다. ‘아직 애들 돌아올 시간은 멀었는데, 누구지?’ 여호와의 증인이거나 무슨 잡상인일 테지. 나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진하게 화장을 한데다 꼬불꼬불한 머리는 요상하게 묶어서 올렸고, 귀에는 귀고리가 요란스럽게 달려있었다. 반바지에다 겨우 앞가슴만 가린 짧은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 여자가 물었다.

“혹시 치와와 강아지 한 마리 못 보셨어요?”
“아니, 못 봤습니다.”
아까 1층 현관에서 본 방문을 떠올리며 간단히 대답하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 그 여자가 ‘잠깐만, 아저씨!’ 하면서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앞 동에서 왔는데요. 아저씨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누가 이 집에 한번 가보라고 해서 왔어요. 정말 못 보셨어요?”
그 여자는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집 안을 기웃거렸다. 마치 강아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뛰어나오기를 바라는 듯…. 가까이서 보니 아까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 눈이 마주쳤던 그 여자였다.

설마 대낮에 남자 혼자 있는 걸 보고 날 유혹하러 온 것을 아닐 테고, 그렇다면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내 모습을 본 그 여자가 나를 강아지도둑으로 의심해서 찾아온 것이란 말인가. 나는 약간 언성을 높이면서 말했다.
“아주머니, 내가 못 봤다고 말했지 않소. 보시다시피 집 안엔 나 혼자밖에 없소. 정 의심이 가면 들어와서 찾아봐도 좋소.”
그때서야 여자는 강아지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듯 “죄송합니다.” 하면서 돌아섰다.
나는 대문을 쾅, 닫고 들어와 마루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면서 중얼거렸다.

“에이 ×팔, 더러워서 백수도 못해먹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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