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노인의 절규
어떤 노인의 절규
  • EPJ
  • 승인 2011.05.1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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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33)
사무실에 조그맣게 켜놓은 라디오에서 6시를 알리는 시보가 울렸다. 나는 타이핑한 내용을 모두 새 USB에 담았다. 하드에 남아있는 자료는 지워버리고 담은 USB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동창생 모임이 있는 7시까지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지하철을 탔다.

여름휴가가 끝난 지난 달 마지막 날 오후, 얼핏 봐도 칠십이 넘어 보이는 한 노인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여기 OO잡지사 맞지?’ 하고 물으며 편집책임자를 찾았다. 그는 두툼한 서류봉투 하나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이거 읽어보고 기사로 좀 내줘.”

봉투를 꺼내보니 청와대에 낸 탄원서, 법원 판결문, 국방부에서 보낸 회신문서, 등기부 등본, 신문기사 스크랩, 복사한 서류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부동산 사기사건에 관한 증빙서류들이었다.

노인이 설명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랬다. 그 노인 소유의 땅 3만5천 평을 부동산 전문 사기꾼에게 몽땅 뺏겼다는 것이었다. 후일 재판을 통해 승소를 했는데도 권력자의 방해로 땅을 돌려받지 못했단다. 그런데 그 서류들의 날짜를 보니 청와대에 낸 탄원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60년대 초반의 것이었다. 내가 반문했다.

“할아버지, 이건 너무 오래 되어서 시효가 지나버렸어요. 시효가 지나면 땅을 도로 찾을 수가 없어요.”
“응, 나도 알아. 그러기에 이리로 왔지. 그런 놈은 언론에서 매장을 시켜야 돼. 남의 땅을 사기 쳐서 부자가 됐으면 분수를 알아야지. 이제 돈 좀 벌었다고 나 같은 사람은 만나주지도 않아. 그런 놈은 천벌을 받아야 돼.”

“할아버지, 그 땅 사기꾼이 도대체 누구예요?”
“시청 앞에서 광화문 가는 길옆에 불그스레하고 으리으리한 빌딩 있지? 그 빌딩의 임자야. 그 놈이 내 땅을 사기 쳐서 떼돈을 벌었지.”

“아니 그럼 R그룹의 창업주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그 놈이 내 땅 3만5천 평으로 성북동에 있는 국방부 땅 10만 평을 맞바꿨지. 그 땅을 쪼개 팔아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니까.”

나는 깜짝 놀랐다. R그룹이라면 30대 재벌에 들어가는 금융그룹으로 창업주인 명예회장은 금융계 발전에 기여해온 공로로 국내외에서 많은 상을 받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노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제3공화국 때 청와대 민원실에 탄원을 해서 조사한 결과 그 사기사건의 전모가 밝혀졌으나 당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던 청와대 모 실장의 방해로 유야무야가 되고 말았단다. R그룹에서 먼저 손을 쓴 탓이었다.

5공 때는 사회분위기가 험악해서 진정을 못했고, 6공 때 다시 청와대에 진정을 했으나 공소시효가 끝나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회신이 왔단다.

“알았습니다. 이 서류들을 찬찬히 훑어보고 사실이 확인되면 저희가 정리를 해서 기사로 내겠습니다.”
사무실 문 앞까지 배웅을 하는 내게 쐐기를 박듯 노인이 다시 덧붙였다.

“내 죽기 전에 그 놈을 매장시켜야 돼!”
그건 차라리 절규였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서류를 찬찬히 검토해보았다. 3공 때 청와대 민원실에서 회신한 서류를 보니 그 노인의 말이 사실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일단 이번호에 내기로 하고 내가 직접 기사를 썼고 이제 최종점검만 남은 상태였다. 그 기사가 나오면 R그룹의 창업주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명성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어느새 지하철이 시청 앞까지 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약속장소로 향했다. R그룹 사옥이 위풍당당하게 서있었다. 약속장소에는 벌써 대여섯 명이 와있었고, 푸짐하게 차려진 복어찜과 함께, 복어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오늘의 화제는 몇 년 전 세간에 물의를 일으켰던 어느 국회의원 비서관의 폭로사건이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비서관을 배려해주겠다고 해놓고 국회의원에 당선되고도 아무런 배려를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서관이 나쁘다고 하는 동창생도 있었고 그 의원이 잘못했다는 동창생도 있었다.

“자신을 승진시켜주지 않는다고 비서관이 모두 까발려 버렸다며…. 한 마디로 돈 때문이야. 폭로하는 대가로 야당 라이벌에게 3억 원을 받기로 했다던데. 그 돈 받아서 외국으로 튀려고 했대.”

“그 의원도 문제가 있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면 고생한 비서관을 배려해 주었어야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잘 다독거려 놓든지.”
“그래도 그렇지, 모시던 상사를 하루아침에 배신하고 그렇게 곤경에 빠뜨릴 수 있어?!”

갑론을박이 계속되었다. 모두들 빠지지 않고 한 마디씩 했다. 대체로, 주인을 배신한 그 비서관이 나쁘다는 의견이 7대 3 정도로 우세했다.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그 노인과 R그룹 명예회장을 떠올렸다. 기사를 잡지에 내면 그 노인은 소원을 풀겠지만 R그룹 회장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아니야, 나는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재벌 치고 초창기에 밀수나 사기 등 나쁜 짓 안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 그렇지만 그들이 우리나라 경제를 오늘날 이렇게 선진국의 문턱에까지 올려놓은 공로는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미 수십 년이 지난 사기사건을 이제야 폭로해서 얻는 것이 뭐가 있을까. 머리속이 혼란스러웠다.

11시가 넘자 모두들 일어섰다. 나는 동창생들과 헤어져 혼자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가다가 시청역 입구 쓰레기통 앞에 멈춰 섰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까? 나는 담배 한 개피를 피워 물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쓰레기통에다 던져 넣었다. 10년 묵은 체증이 가라앉은 듯 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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