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걱정이 더 커졌다. 지난 번 모임에서 헤어질 때 현석이가 꼭 들어보라고 준 테이프 때문이었다. 두 개나 됐다. 한 쪽을 듣는 데 30분이 걸리면 앞뒤로 한 시간, 두 개니까 두 시간은 들어야 하는데….
그때는 ‘알았다. 들어보마.’ 하고 말 했지만 집에 가져와서는 그냥 책상서랍 속에 넣어뒀다. 쓰레기통에 넣어 버릴까 했지만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그건 열심히 녹음해서 가져온 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언제 한번 날을 잡아서 들어보자고 생각했던 것이 차일피일 미루다 벌써 두 달이 흐른 것이다.
정말이지 그 테이프를 들어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신앙 간증 테이프란 안 들어봐도 내용이 뻔하지 않은가. 기도 중에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둥, 아니면 주님의 기적으로 불치의 병이 나았다는 둥 하는….
모임에 가면 현석이가 틀림없이 물어볼 텐데 어떡한다? 듣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안 들었다고 할 수도 없고, 안 들어놓고 들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가 물어보면 금방 탄로가 나고 말 터이니.
독실한 크리스천인 현석이는 OO화재의 노조위원장과 금융노련 간부를 맡고 있다. 키는 180cm인데 몸무게는 50kg가 겨우 넘는 깡마른 체구이다. 언젠가 함께 사우나에 갔다가 그 친구의 알몸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그의 몸에는 정말 살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마치 영화에서 본, 수용소에 수감된 유태인처럼 뼈에 껍질(?)만 붙어있었다.
그의 일과는 대부분 단식투쟁과 철야농성, 그리고 노조원들의 애경사를 좇아 뒷바라지 해주는 것으로 채워진다.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 들어오지 않는 날이 훨씬 더 많다. 그 친구가 명동성당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동료들과 함께 불끈 쥔 주먹을 흔들고 있는 장면을 TV화면에서 볼 때도 있다.
제 몸과 가정을 돌보지 않고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싸우는 그 친구를 나는 존경한다. 그 친구를 버티게 하는 힘이 신앙심이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아는 한, 현석이는 기독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참 크리스천이다.
그에게는 신앙 간증의 소재가 될 만한 뼈아픈 과거가 있다. 2년 전 어느 날 밤, 충북 어느 곳의 국도를 혼자 차를 몰고 가다가 중앙선을 넘어오는 트럭을 피하려다 가로수를 들이받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마침 인근 부대의 군인들이 그를 발견하고 가까스로 병원으로 옮겼는데 갈비뼈 4개와 목뼈가 부러지고 장이 파열되는 중상이었다. 연락을 받고 친구들이 면회를 갔을 때, 온몸이 붕대로 칭칭 감겨 겨우 입만 살아있던 그가 이런 말을 했었다.
“하느님이 아직도 더 써먹을 일이 있어서 날 데려가지 않은 것 같아.”
그 말이 정말 실감이 났다. 3개월 만에 멀쩡하게 퇴원한 그를 보고 무신론자인 나조차도 정말 하느님이 보살펴서 기적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런 점에서 천성적으로 게으른 나는 그와 정반대이다. 나는 한 곳에 얽매이기가 싫다. 일요일에 어디를 정기적으로 나가는 것도 싫다. 가능한 한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
그래도 내게서 굳이 종교적 성향을 따지자면 기독교 쪽은 아니다. 심정적으로는 불교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부모님께서 결혼 후 16년간 아이를 못 낳다가 지극한 불공 덕분에 부처님의 은덕으로 나를 낳았다고 하니말이다.
모임 하루 전날, 나는 드디어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저녁을 먹고 아내와 함께 현석이가 준 테이프를 녹음기에 넣었다. 내일 모임에 나가려면 오늘밖에는 들을 시간이 없다.
그 테이프에는 두 가지의 간증 사례가 담겨져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는 어느 집의 아이가 심장판막증 선고를 받아 수술날짜를 잡았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선고를 받은 날부터 100일기도를 시작했다. ‘제발 저 어린것의 몸에 칼을 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단다.
수술 날이 되어 검사를 해본 결과 아이의 몸에 열이 있어서 다시 한 달 후로 수술날짜를 늦추었다. 그런데 그날도 감기 때문에 수술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다시 한 달 후로 수술날짜를 잡았는데 그날이 공교롭게도 100일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그 날, 그 어머니가 새벽기도 중에 아이의 병을 낫게 해주겠다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아침에 수술을 하기 위해 다시 검사를 해보니 아이의 병이 감쪽같이 나아있더라는 것이었다. 결국, 아이의 몸에 칼을 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주님이 들어주셨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저녁, 모임이 끝나갈 무렵 나는 현석이한테 그 테이프를 들어보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아이의 경우 주님이 아이의 병을 낫게 해준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오진(誤診)이었거나, 아니면 다른 변수에 의해 저절로 나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생각을 한다며, ‘단지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네가 살아가면서 저지른 모든 잘못에 대해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고, 힘들 때 너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신다.’고 전도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그 테이프를 들은 것만으로도 가능성이 보인다며, 나 같은 스타일은 한번 들어오기가 어렵지 일단 들어오기만 하면 확실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나.
“됐어, 그만 해. 네가 뭐라 해도 내가 크리스천이 되는 일은 없을 거야.”
나는 여기서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단호하게 말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어제 들었던 테이프 두 개가 책상 위에 있는 것을 보고는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큰짐을 벗어놓은 것처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오니 책상 위에 소포가 하나 놓여 있었다. 뜯어보니 맙소사! 현석이가 보낸 간증테이프였다. 그것도 자그마치 열 개나 됐다.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