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꿈
낮 꿈
  • EPJ
  • 승인 2010.12.0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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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28)

설날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오후, 나는 아동복이 주렁주렁 벽에 걸린 화곡동의 한 조그만 가게에서 의자에 앉아 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양손에 선물꾸러미를 든 사람들이 분주히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명절이 코앞인데도 요즘 손님이 통 없다.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차라리 가게를 처분해버리고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보험설계사나 해볼까? 잘 하면 매월 수백만 원도 벌 수 있다는데, 시간도 비교적 자유롭고…. 안 되지,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가 옷가게를 차린 것은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그달 그달 생활비 충당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애들이 어릴 때는 주택부금 넣고도 조금 여유가 있었으나 큰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주택부금 넣기도 힘겨웠다.

나는 부업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이 뒷바라지와 집안 살림은 시어머니께서 맡아서 해주시기로 이미 내락을 받은 터였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남편도 시어머니께서 ‘애들 학원비라도 벌겠다는데 한번 해보게 놔둬라’는 말씀을 듣고는 마침내 승낙을 했다.

드디어 지난 4월에 남편이 회사에서 5,000만원을 융자받아 왔다. 나는 그 돈으로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파트단지 입구 큰길가에 8평짜리 가게를 얻어 아동복점을 차렸다.

모자라는 돈은 월세로 돌렸다. 그 동안 알뜰살뜰 모아놓은 자금으로 가게 내부도 꾸미고 물건도 잔뜩 해 넣었다. 아동복을 택한 것은 마진이 좋다는 점, 이곳이 주택가라서 젊은 부부들이 많다는 점, 또 백화점이 멀다는 점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장사는 그럭저럭 잘 됐다. 2, 3일에 한 번씩 새벽 2시에 일어나 동대문시장에 물건 사러가야 하는 것, 매일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꼼짝없이 가게를 지켜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그 동안 단골도 제법 많이 확보했고 또 매일 밤 집에 와서 돈 세는 재미도 있었다. 월 평균수입을 계산해보니 거의 남편 월급에 육박했다.

그러나 겨울 들어 매상이 부쩍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시장이 생겼고 그 곳에 커다란 옷 가게가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아동복은 치수가 워낙 다양해서 구색을 다 갖추려면 매장이 넓어야 하는데 가게가 좁은 것이 문제였다.

나는 단골손님을 뺏기지 않으려고 원가에 조금만 이문을 붙여서 싼값에 팔았다. 그러다 보니 매상은 전과 비슷해도 수입은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무슨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물건을 처분하고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느냐, 아니면….

따뜻한 햇살 때문인지 살포시 졸음이 왔다. 그 때 천사처럼 보이는 부인 두 사람이 가게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만 원짜리 한 다발을 내 손에 쥐어주고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 급히 뒤따라 가보았으나 어느 쪽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참 별 일도 다 있구나 생각하며 그들이 주고 간 돈을 세기 시작했다.

‘아줌마가 졸고 계시네.’ 하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옆에 서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졸다가 꿈을 꾼 모양이었다. 그런데 옷차림새를 보니 조금 전 꿈속에서 만난 여자들과 흡사했다.

한 여자가 대여섯 살짜리 아이의 반코트와 바지 하나를 고르며 ‘이거 얼마예요?’ 하고 물었다. ‘반코트는 12만원, 바지는 3만5천원’이라고 했더니 대뜸 15만원을 꺼내주며 ‘이거면 됐죠?’ 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함께 온 여자가 마치 내 속이라도 들여다보듯 ‘요즘 장사 잘 안되죠?’ 하더니 가져온 가방을 열며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화장품 세트였다. 옷가게를 하면서 미제 화장품을 팔아보라는 것이었다. 마진도 아주 좋단다.

나는 꿈에서 두 여자가 돈 다발을 주고 간 것을 떠올리며 이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러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케이스를 살펴보니 모두 영어로 쓰여있었고 ‘Made in USA’ 라는 글자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 속에는 크림, 로션, 립스틱 등 10여 가지가 들어있었는데 향도 좋고 포장도 독특하고 멋이 있었다. 요즘 신세대와 미시족들에게 인기가 좋단다. 한 세트의 소매가가 40만원인데 10만원에 넘겨준다는 것이었다.

미군을 통해서 수입하는 것이란다. 아주 반응이 좋아 서로 팔겠다고 아우성이지만 한 구(區)에 한 군데 외에는 절대로 물건을 공급하지 않는단다. 꺼내놓은 화장품 한 세트를 서비스로 주겠다며 한 번 사용해보라고 했다.

내가 망설이고 있자, 한 여자가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커다란 박스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소매가로 모두 800만원어치인데 200만원에 주겠다는 거였다. 오늘은 100만원만 내란다. 나머지 100만원은 한 달 후에 결제를 하고.

화장품 진열대는 내일 본사에서 나와서 무료로 설치해 준단다. 그때 대리점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 된다는 거였다. 그 여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모두 영어로 씌어있었다. 주문할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를 하라고 했다. 바로 다음날 갖다 준단다.

욕심이 났다. 4배 장사였다. 반값으로 할인해서 한 세트에 20만원씩만 받아도 곱장사였다. 아동복은 소비자가격을 다 받아야 2배 장사인데…. 가진 돈을 모두 합해도 30만원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잠시 기다려라 해놓고 이웃 슈퍼에 가서 50만원을 꾸었다. 80만원을 내놓자 처음에 옷을 샀던 여자가 나머지 20만원은 옷으로 가져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여자는 아이 옷을 몇 가지 더 골랐다.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그들이 돌아간 지 얼마 후, 아이 옷 사러 온 젊은 새댁에게 25만원을 받기로 하고 화장품 케이스 하나를 뜯고서였다.

분명히 겉 케이스는 샘플과 같았으나 속의 내용물은 달랐다. 화장품용기에 붙어있는 영문이 조잡하게 인쇄돼 있었고 내용물은 아무리 봐도 형편없는 싸구려였다. 다른 케이스를 뜯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아차, 속았구나! 나는 부리나케 아까 받았던 명함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녹음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번호를 잘못 눌렀나 하고 또다시 걸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국번이거나 결번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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