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황태
어떤 황태
  • EPJ
  • 승인 2010.10.05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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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사 편집부장직을 그만두고 두 달째 집에서 백수생활을 하고 있던 지난 10월 말, 학회 사무국장으로 있는 한 친구로부터 취업을 추천하는 전화가 왔다.

“새로 생긴 학회 사무국장 자리야, 학회에 근무경력이 있고 글 잘 쓰는 사람을 찾는다기에 너를 추천했어. 마음이 있으면 이력서를 내일 아침에 K대 황O영 교수 앞으로 보내. 그 학회 부회장이야. 팩스번호는 869-67×3이고. 참, 노파심에서 얘기하는 건데, 그 사람 개성이 아주 강하니까. 가급적이면 부딪치지 마라.”

“응, 알았어. 고마워.”

이력서를 보낸 지 이틀 만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과총회관에 있는 그 학회 사무국으로 찾아갔다. 회장도 황 부회장과 함께 나와 있었다. 집기비품을 새로 들여왔는지 사무실이 아주 깔끔했다. 여직원 한 사람이 근무하고 있었다.

과학기술자를 발굴해 널리 알리는 일을 하며 최근에 과기처에 설립등기 신청을 했단다. 기존 학회와 업무가 비슷하지만 과학자들의 전기(傳記) 발간업무가 많아 글 잘 쓰는 사람이 필요하단다. 면접은 순조로웠다. 학회에서 4년 여 동안 근무했던 경력과 작가인 점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았다.

다음날부터 출근을 했다.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전부터 근무하고 있던 미스 임과 함께 열심히 관공서를 쫓아다니며 학회 운영에 필요한 제반 절차를 밟아나갔다. 임원등기, 사업자등록, 출판등록, 지로신청….

12월 중순 어느 날, 내일 있을 이사회에 보고할 내년도 예산안을 작성하고 있는데 황 부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스 임을 퇴근시키고 나서 자기에게 전화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미스 임이 퇴근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내년 예산안을 짤 때 여직원 인건비는 빼란다. 이 달 말에 미스 임을 퇴직시키고 내년부터는 나 혼자 근무를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리 재정이 어렵더라도 설립할 때부터 고생한 여직원을 내쫓는 것은 곤란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또, 우체국과 은행에도 가야하고 밖에서도 일을 봐야 하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해나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안 된다며 내일 이사회 전까지 예산안을 짜놓으라고 강압적으로 말했다.

그 사람, 입만 열었다 하면 잘난 체를 하고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더니…. 또, 회의에서도 다른 사람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서 문제 제기하고 혼자서 결론을 내는 사람으로 유명하다더니….

그런 사람을 회장단에 참여시킨 것은 그의 뛰어난(?) 능력이 외부에서 많은 돈을 끌어올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라더니….

다음날 아침, 나는 회장에게 전화를 했다. 황 부회장이 여직원 인건비를 내년도 예산에서 빼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지를 물었다. 회장은 자신이 책임지겠으니 여직원 인건비를 일단 예산안에 반영하라고 했다.

이사회가 열리기 한 시간쯤 전에 회장이 왔고 얼마 후에 황 부회장이 왔다. 나는 예산안을 복사해서 두 사람에게 주었다. 예산안을 찬찬히 훑어보던 황 부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무국장! 여직원 인건비를 빼라고 했는데 왜 넣었어?”

미스 임이 옆에 있는 데도 그는 큰 소리로 내게 힐문했다. 그의 음성이 격앙돼 있었다.

“네, 회장님과 상의를 했는데 일단 넣으라고 말씀하셔서 넣었습니다.”

회장이 나서서 지원사격을 했다.
“그 문제는 말이오. 총무이사가 이사회 때 해결책을 마련해 오기로 했소. 그래서 내가 일단 넣으라고 했소.”

그러나 그도 물러서지 않았다. 분명히 빼라고 지시를 했는데도 회장 말만 듣고 넣었으니 사무국장이 자기를 무시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분개하는 것은 이제 여직원을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계속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럼 난 안 해! 난 빠질 테니까 두 사람이 어디 마음대로 잘 해봐.”
그는 예산안을 탁자 위에 팽개치고는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날 이사회에서 ‘여직원은 총무이사가 재직하고 있는 연구소에서 당분간 인건비를 보조해주기로’ 결정을 했다.

그 부회장은 끝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사회가 끝나고 이사들이 다 돌아가고 난 뒤 회장과 단 둘이 남았을때 나는 ‘저 때문에 회장님과 부회장님 두 분 사이가 벌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하면서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회장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사무국장, 아까 황 부회장이 하던 말은 다 잊어버리세요. 그 사람은 본래 그런 사람이니 괘념치 마시고 근무하세요.”

그 후 황 부회장으로부터는 전화 한 통 없었다. 한 달이 지났다. 다음 이사회 때가 되어, 참석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달 마지막 날 퇴근시간 무렵, 아무 예고 없이 회장이 찾아왔다. 그리고 날 불러서 옆에 앉히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무국장, 황 부회장이 학회 일에 완전히 손을 떼겠다며 협조를 안 해주고 있어요. 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학회 재정이 어렵게 될 것 같아요. 미안하지만 사무국장이 여기를 떠나야 할…. 미안합니다.”

어이가 없었다. 회장이 하는 말에서 황 부회장이 학회일 협조를 담보로 회장을 협박하고 있다는 뉘앙스도 느껴 졌다.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이 상황에서 말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나는 입술을 깨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을 함께 하자는 회장의 간곡한 청을 마다하고 먼저 가겠다며 사무실을 나왔다. 이렇게 황당하게 당하는 게 황태구나 생각하니 나도 몰래 쓴웃음이 나왔다. 첫 출근한 지 꼭 석 달 만이었다.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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