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야구단 마지막 감독 권백행”
“한전야구단 마지막 감독 권백행”
  • 김춘성 기자
  • 승인 2007.02.28 13:5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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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로의 신사로 돌아와 앉은 그라운드의 맹장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감독 어우홍, 영원한 4번 타자 박영길, 그라운드에서 쓰러져 유명을 달리한 프로야구 롯데의 감독 김명성. 그리고 한국야구의 고독한 신사 김계현 감독, 홈런왕 황성록, 아마선수로는 유일하게 대표 팀에 단골로 뽑히던 백재우, 사자같이 돌진하던 강태정 감독, 투수조련의 대가 이충순 코치 등 이름만으로도 한국야구를 호령했던 이들이 누구인가.

프로야구가 시작되기 전 까지 한국야구를 이끌었던 한국전력야구단이 배출해낸 스타들의 면면이다. 이밖에도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길러내며 실업야구의 강자로 군림하기를 40여년. 전신인 남전, 경전 까지 거슬러 오른다면 장장 한 세기를 이어온 한전야구단은 지난 2003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전통의 한전야구단의 마지막을 찢어지는 가슴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권백행 감독. 촉망받던 신인선수로 입단 첫해부터 주전 자리를 꿰차며 박영길, 황성록에 이어 한전야구의 강타선을 리드했고, 플레잉코치를 거쳐 감독에 올라 한전야구의 영예를 지켜내며 평생을 야구와 한국전력에 바친 권백행, 그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Electric Power가 그를 찾아 나섰다.

“72년 입사 올해로 35년째, 영원한 한전맨”

2007년 2월 7일 한국전력공사 인제지점장실. 인제 지점장 권백행(57). 야구모자를 벗은 그의 머리엔 어느덧 흰머리가 서리로 내려 앉아 있었고, 매서운 눈빛을 감추던 검은 선글라스를 대신해 두꺼운 코에는 돋보기가 걸쳐 있었다.

누가보기에도 노련한 경영자의 모습일 뿐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이끌고 그라운드를 내달리던 승부사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불뚝한 배를 내밀고 뚜벅뚜벅 마운드에 올라 투수를 교체 하거나 작전을 지시하고, 때로는 호랑이 같은 음성으로 심판에게 어필하던 맹장 권백행 감독이 LCD 모니터를 응시하며 결재서류에 사인을 하는 지점장으로 변해 있었다.

먼 길을 달려오느라 수고 했노라고 반가이 맞이하며 차 한 잔을 나눌 때까지도 권 지점장은 야구얘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 자신은 야구계와 선후배들에게 죄를 진 심정으로 살기에 아픈 지난날을 떠올리기가 싫단다.

깔끔하고 멋지게 지어진 사옥에 관한 이야기며 수해복구 사업 등 업무 이야기에는 열을 올리다가도 야구 근처만 가면 입을 다물며 눈길을 돌리는(그럴 때는 강공을 지시 해놓고 팔짱을 낀 채 두둑한 배를 내밀고 딴청을 피우던 영락없는 감독의 모습이었다) 권백행 감독을 겨우겨우 설득해 가며 몇 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한전과 농협, 상업은행, 한일은행이 한국야구의 최강을 놓고 치열하게 자웅을 겨루던 70년대, 한국야구의 최고봉은 실업야구였다. 지금의 프로야구만큼 열기나 호응은 아니었지만 당시에도 실업야구 스타선수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1972년, 한양대학교 외야수 권백행 선수는 한국전력야구단 김계현 감독의 눈에 띄어 한전 야구단에 입단을 한다. 4학년 학생 신분 이었지만 이른바 입도선매로 한전에서 미리 데려다 놓은 것, 스카우트된 것이다.

어떻게 해서 한전에 입사를 하게 되셨는지요

당시만 해도 한전 야구단에 연습장이 없었답니다. 따라서 주로 대학 야구장을 빌려 연습을 할 수 밖에 없었지요. 당시 한전팀이 저희 한양대학 운동장을 빌려 연습을 하곤 했지요. 그런데 오후에는 대학팀이 연습을 해야 하니까 한전팀은 오전에 연습을 할 수 밖에요. 그러다 보니 저희들과 거의 같은 팀이다 싶게 운동장을 사용했고, 그 과정에 김계현 감독님이 저를 유심히 지켜보고 계시다 데려가신 거지요. 그렇게 해서 입사를 하게 된 겁니다.

당시 한전팀의 전력이나 위상은 어떠했습니까

막강했지요. 김명성, 이충순 등 투수진은 물론이고 박영길, 황성록, 강태정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하지 않습니까? 대회 때마다 항상 우승후보로 거론될 만큼 막강한 전력이었고 프로가 태동되기 전이어서 국가 대표 팀에도 저희 한전팀 선수들이 다수 들던 시절이었습니다.

선수이자 한전 사원의 신분인데 당시 근무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때는 원래 오전 근무 오후 연습 시스템이었습니다. 선수단 전체가 한 소속으로 배치되어 있던 때입니다.
당시 저희 야구단은 연수원 소속 이었는데, 아까 말했다시피 전용 연습장이 없는 관계로 대학의 야구장을 빌려 이리저리 옮겨 다닐 때라 오전에 연습을 할 수 밖에 없었지요. 오후에는 주인인 학생들이 연습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오전 근무 오후 연습이 잘 지켜질 수가 없었습니다. 자연히 근무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지요. 물론 소속 지점장님의 배려로 연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그만두고 현업에 복귀할 때 많은 어려움이 따랐지요.

선수들은 종목별로 숙소가 따로 있었나요

그때 신당동에 ‘장진요’라는 회사 독신자 숙소 비슷한 게 있었어요. 목조건물로 삐그덕 소리가 나는 그 건물 2층에 종목에 관계없이 젊은 선수들이 묵었지요. 그러다가 70년대 후반쯤에 저희 야구단은 청구동으로, 축구는 필동 이런 식으로 각각 나누어졌지요.

당시 회사에서의 관심이나 지원은 어떠했습니까 응원도 나오고 했나요

그건 회사 사장님에 따라 다릅디다. 최고경영자가 운동에 관심이 있으시면 관심도 대우도 달라졌지요. 김상복 사장님이나 박정기 사장님 같은 분들은 운동부에 관심이 많으셨지요.  대회 출전 때 버스배차 받기가 힘들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전의 통근버스 제도가 없어지면서 전용차량을 마련했지요. 야구뿐만 아니라 다른 운동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애사심이 나던가요

여건이야 그랬지만 당시 사원들이 운동부를 많이 아껴 주었습니다. 동대문야구장에서 결승전이라도 할라치면 인근 중부지점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사원들이 풍물패까지 동원해 나와 응원해 주곤 했으니까요.

언젠가 한전팀이 우승을 한 대구 시장기 대회 때에는 대구 경북지역의 사원들이 총동원 되다시피 경기장에 와서 응원을 해 주었고 우승 후에 숙소에 도착해 보니 음식을 산더미처럼 장만해 놓고 서로 우승의 기쁨을 나눴던 기억도 납니다.

개인적으로 선수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시합은

아까 말씀드렸던 그 대구시장기 결승전일 겁니다. 아마 롯데팀과 결승에서 마주쳐서 2-2로 팽팽하게 맞서던 9회 말이었습니다. 제가 4번 타자를 맡고 있었는데 상대 투수는 당시 최고의 투수인 유남호 선수였습니다.

제가 첫 타자로 타석에 들어서게 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당시 어우홍 감독님이 그러시는 겁니다. 무조건 크게 넘기라고. 당시 대구구장 백스크린 뒤에는 포플러나무가 빙 둘러서 있었는데 유남호 투수의 공을 제가 홈런으로 연결시켜 우리가 우승을 했지요.

그런데 그때 때린 공이 야구공이 아니라 탁구공 같더라니까요. 아득하게 날아가는 것이 포플러 숲을 한참 넘어가더라고요.(웃음)

“80년부터 코치 생활 시작, 관리자로 변신”

선수생활을 마치고 권백행 지점장은 코치와 감독직무대행을 거쳐 88년 한전야구단 사령탑에 오른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가 마지막 감독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토로했다.

프로야구가 활성화 되고 실업야구가 사회인 야구나 동호회 리그로 쇠락의 길을 걸을 때도 그는 야구 사랑의 열정 하나로 한전 야구단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장강의 물을 거스를 수 없듯 한전에도 운동부 정리의 회오리가 불어 닥치고, 야구 사랑과 열정 하나로 버티기에 권백행 감독의 힘은 어쩔 수 없이 약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한전야구단의 해단을 그는 2003년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그날이후 그는 죄인으로 사노라고 말했다.(이럴 때마다 기자도 아픈 상처를 끄집어내는 듯해 괜히 묻기가 죄스러웠다.)

“양구지점장으로 현업복귀 사령탑에서 경영자로”

아픈 가슴을 안고 영욕의 시절을 묻은 채 2003년 권백행 감독은 권백행 지점장이 된다. 그리고 화천지점을 거쳐 인제지점으로 부임해 오늘에 이른다.

지점장으로 부임하시면서 어떤 다짐을 하셨는지요

우선은 입조심을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운동장에서 승부를 겨루다 보면 가끔 거친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현업은 환경이 다르잖아요. 그 다음엔 공간에 철저하게 적응하자였습니다. 탁 트인 운동장과 사무공간은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렇겠네요. 힘드셨겠습니다. 그밖에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저기 저 컴퓨터요.(웃음)

끝으로 감독이실 때나 지점장이실 때나 지휘방침은 같은가요 아니면 다르신가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저는 감독이나 지점장이나 어떤 조직이거나 화합을 최고의 가치로 놓습니다. 그런데 화합은 믿음이 없으면 이뤄낼 수가 없습니다. 지휘관은 조직원들의 화합을 위한 믿음을 끌어내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로 특별한 방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분위기 조성에 기능을 다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바탕으로 화합이 이뤄지면 자율도 자연스레 형성되고 생산성의 질도 올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운동이나 업무나 같다고 봅니다. 단 저는 게으름은 싫어합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게으른 것이고 바로 이런 사소한 개인의 게으름이 조직의 동력을 갉아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긴 시간 감사합니다. 끝으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다른 것은 없고 저를 믿고 저와 함께 한전 야구의 전통을 이어준 동료 선배 후배들에게 정말 면목 없을 뿐입니다. 특히 후배들의 버팀목이 돼주지 못함에 그저 맘이 아립니다. 언제 어디서든 한전맨으로, 야구인으로 자부와 긍지를 가지고 살아주길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한전야구의 맥을 마치 자신이 끊어버린 듯한 자책에 권백행 지점장은 괴로워했고, 그런 그에게 과거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기자도 괴로웠다. 그만큼 그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져져 있었다. 김연숙(56)여사와의 사이에 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소원(28)양과 스포츠관련 대학원에 다니는 소용(25)군을 두고 있는 권백행 지점장의 요즘 소망은 딸 권소원 선생님의 결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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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갑 2009-10-16 20:53:57
거기서 일할때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지점장님 야구인생 대단하셨었군요...싸인받아둘걸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