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술 상무의 일과표
어느 술 상무의 일과표
  • EPJ
  • 승인 2010.08.13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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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 (24)

“이런 회사가 또 있겠어?”

우리 회사 빌딩 7층에 근무하는 그 친구는 자리에 앉자마자 회사자랑을 늘어놓았다. 자신이 처리할 업무는 오전이면 끝나고, 오후에는 일본 바이어들 접대를 하는데, 말이 접대지 실상은 술 마시는 게 전부란다.

물 좋은(?) 호스티스들을 불러놓고 최고급 양주에다, 안주도 마음대로 시킨단다. 또 흥이 나면 밴드도 부르고. 술값이 얼마가 나오든 모두 회사에서 지불해주니 이런 직장이 어디에 또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나온 친구이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우리는 함께 OO보험회사에 응시했다가 나는 합격했고 그는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행운이었으니 두 번째 도전에서 굴지의 재벌인 H그룹 공채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가 발령을 받은 H상선은 우리 회사 건물에 입주해 있었다.

그와 나는 소속은 달랐지만 같은 건물 7층과 4층에서 근무하게 됐다. 같은 건물에 있어도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직장생활에 적응하느라 서로를 찾아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입사 4개월 만에야 퇴근길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가 수습발령을 받은 부서는 부정기선부였다. 화물을 실어 나르는 자사 선박의 진로를 체크하고 수시로 연락을 받아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일이 그의 담당업무였다. 항상 컴퓨터 앞에 대기해야 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시간적인 여유는 많았다.

그는 대학에서 부전공으로 이수(履修)하던 일본어 공부를 더하기로 하고, 퇴근 후에는 일본어 학원에 다녔다.

어느 날, 회사를 방문한 일본인 바이어와 복도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 장면을 본 영업부장이 수습기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그를 영업부로 데려갔다.

영업부에서 그가 맡은 업무는 회사에 찾아오는 외국손님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일본 바이어들의 접대였다. 활달한 성격에다 일본어 실력까지 갖추었으니 그로서는 확실하게 제 자리를 찾은 셈이었다.

주석(酒席)에서도 좌중을 휘어잡을 만큼 그의 존재는 돋보였고 손님들도 하나같이 그를 좋아했다. 그의 활약과 함께 실적도 늘어갔다. 한 번 왔던 바이어들이 다시 오면 어김없이 그를 찾았다.

이제 회사의 간부들조차도 그를 ‘상무’로 부를 만큼 술 상무(?)로서의 그의 위치는 확고했다. 술집에서도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더러는 그를 따라나서는 호스티스와 함께 하룻밤 정염(情炎)을 불태우기도 하고….

“이만하면 괜찮은 직업 아니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직업복(職業福)을 자랑했다. 그와 헤어져 혼자 집으로 돌아오면서, 적성에 맞는 자리를 잡은 그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허구한 날 책상 앞에 앉아 보험청약서와 씨름하는 내 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했다. 내가 다시 그와 마주친 것은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일 년이 넘은 어느 화창한 봄날의 퇴근길에서였다.

거의 10개월 만에 다시 만난 그 친구는 눈에 띄게 수척해 있었다. 우리는 함께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에게 물었다.

“너 어디 아프냐?”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얼핏 보아도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전에 보였던 넘치는 자신감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기백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젠 회사자랑은 커녕, 회사얘기는 꺼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의 거듭된 채근에 겨우 말문을 연 그가 호주머니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꺼냈다. 그의 하루 일과표였다.

- 6시 : 기상 및 세면(H사 독신자아파트)
- 6시반 : 아침식사(구내식당)
- 7시 : 회사 통근차 출발(출근)
- 8시 : 오전일과 시작(하루 스케줄 확인, 업무처리)
- 12시~1시 : 점심식사
- 오후 2시 : 김포공항으로 출발(일본손님 영접)
- 오후 4시 : 일본손님 호텔로 안내, 여장을 풀고 다시 요정으로 모시고 와서 접대 시작
- 오후 8시 : 회사에서 근무를 마친 간부사원이 나오면 손님인계(퇴근)?

이대로만 지켜지면 아무 문제가 없단다. 그가 들려준 하루하루는 일과표와는 많이 달랐다. 저녁 8시쯤 간부 사원이 나오면 그는 퇴근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처음 몇 번은 그 시간에 퇴근을 했는데, 그가 가고 나면 다시 분위기가 서먹해져서 상담(商談)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결국 영업부장의 지시로 그는 마지막 술자리가 파할 때인 밤 12시가 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손님들을 호텔로 가는 택시에 태워주고 독신자 아파트로 돌아오면 늘 밤 한 시가 넘어있었다.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새벽 두 시, 그러니 아침 6시에는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자명종을 아예 6시 40분에 맞춰놓고 있었다. 매일, 아침을 굶고 7시에 출발하는 회사 통근차에 올랐다. 몇 번 통근차를 놓치고 지각을 했더니 월급이 깎여서 나왔다.

오후에 공항에 나가면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야 되니 제대로 하는 식사는 점심 한 끼가 고작이었다. 그나마 점심도 입맛이 없어 공깃밥 한 그릇을 다 비울 수가 없었다. 10개월 동안 몸무게가 14kg이나 빠졌단다.

숙취가 계속 쌓이고 늘 잠이 모자랐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가장 고역이었다. 출근하면 늘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았고, 손님 접대가 없는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은 종일 밥도 안 먹고 숙소에서 잠만 잤다. 목요일이나 금요일쯤에 밤늦게 숙소에 돌아올 때는 지쳐서 완전히 파김치가 되곤 했다.

나는 그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당장 다른 부서로 옮겨달라고 해라’고 말했다. 안 되면 사표를 내라고 했다. 그의 확답을 듣고 나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그는 좀 더 생각해보겠다는 듯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월요일 오전, 그가 4층으로 나를 찾아왔다. 출근하자마자 영업부장에게 다른 부서로 옮겨달라고 했단다. 그러나 부장의 대답은 싸늘했다. 매일 밤늦게까지 수고하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거였다.

그는 어젯밤에 쓴 사표를 부장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휘둥그레진 부장의 눈길을 뒤로 하고 사무실을 나왔단다. 그리고 바로 이리로 왔단다. 그가 말했다.

“너희 회사 경력사원 뽑는다고 신문에 났더라. 입사 원서 한 장 구해줘.”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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