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과 돈키호테
햄릿과 돈키호테
  • EPJ
  • 승인 2010.07.1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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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마당 (23)

하숙집에서 저녁을 먹고 여느 때처럼 학교 도서관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옆방의 4학년생 강병욱 씨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손 형, 오늘은 도서관에 가지 말고 나랑 소주나 한잔 합시다.”

그가 들어서자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그의 손에는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 마리가 들려져 있었다. 거의 일 년 동안 한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지만 그가 초저녁에 술을 마시고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오늘따라 웬일인가 싶어 나는 도서관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손 형,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오늘은 손 형한테 모두 털어놓고 자문을 좀 구해야겠소. 날 못난 놈이라고 욕해도 좋소.”

그는 얘기를 꺼내기가 무척 힘이 드는 듯 소주잔을 연거푸 몇 번 들이키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강병욱 씨가 술기운을 빌어 털어놓은 얘기는 대강 이러했다.

지난 봄, 우리 하숙집 바로 옆집에 묘령의 아가씨가 들어왔는데, 한 마디로 한눈에 반했단다. 알아보니 옆집 아주머니의 여동생으로 학원에 다니려고 언니 집에 와있는 것이란다.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오후, 배드민턴 공 하나가 하숙집 마당으로 날아들었고, 곧이어 그 아가씨가 대문으로 들어왔다. 그가 공을 주워서 그 아가씨의 손에 건네주는 순간, 온몸이 짜르르 하는 전율을 느꼈단다.

그때부터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그 아가씨에게 온통 마음을 다 뺏겨버린 것이었다.

지난 여름방학 때 다른 하숙생들이 모두 고향으로 내려간 뒤에도 그는 혼자 하숙집에 남아 있었는데 취직준비는 핑계였고 사실은 그 아가씨 때문이었다. 하숙방 창문 너머로 그 집을 기웃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하루라도 그녀를 보지 못한 날은 종일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늦게 하숙방으로 돌아왔다가 약간 열려진 창문 틈 사이로 그녀가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 모습을 훔쳐보게 되었다. 그날부터 그는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었고 밤마다 그녀의 환영(幻影)에 사로잡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사를 해보려고 했지만 어쩌다가 집 앞에서 그녀와 마주치는 날이면 인사를 건네기는 커녕, 도무지 얼굴이 화끈거려서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2학기 개강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그녀와 자주 배드민턴을 치곤 하던 그 집 중학생이 집 앞에서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그 아이를 포섭(?)해 그녀의 이름과 나이,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조영희. 22세.’
그날 밤, 그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작전 짜기에 골몰했다. 처음엔 편지를 보낼까 생각했지만 답장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어 포기하기로 했다. 결국 고심 끝에 직접 전화로 부딪쳐 보기로 했다. 이야기가 잘 되면 학교 앞에 있는 카페로 나오라고 해야지….

다음날 저녁 무렵 그녀가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일부러 집 앞 골목길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로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마디도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밤새도록 연습을 했건만 도무지 목구멍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뒤부터는 그녀가 집 앞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으면 왠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만 같아 하숙방으로 뛰어 들어오기가 바쁘단다.

“손 형, 어떡하면 좋소?”
그는 요즘도 온통 그 여자에게 마음을 다 뺏기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단다.

“걱정 마시오. 나한테 맡겨주시오.”
나는 우선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곧바로 마루에 나가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바로 옆집이라서 그런지 목소리가 육성으로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옆집 하숙생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지금 바로 옥상에서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이곳의 주택들은 옥상의 끝이 거의 맞붙어 있어서 쉽게 건너갈 수 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당황한 기색을 역력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나온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차분했다.

“10분 후에 올라가겠어요.”
좀 있다가 옥상에 올라가니 반달이 동그마니 떠있었다. 좀 있으니 저쪽에서 여자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차츰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자 그녀가 사뿐사뿐 이쪽으로 걸어왔다. 비누냄새가 향긋하게 코끝에 와 닿았다.

나는 이 집 하숙생이라고만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강형에게서 들었던 것 중 목욕탕 얘기만 빼놓고 그녀에게 해주었다. 그리고 성격은 좀 내성적이지만 괜찮은 사람이라며 사귀어보라고 했다. 그녀는 몹시 놀라는 듯 했고 어느 학생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좀 생각해보고 전화를 하겠다며 그녀가 하숙집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그러지 말고 이따가 10시에 강병욱 씨를 옥상에 올려 보낼 테니 직접 만나보라고 했다.

그리고 약속의 증표로 손목시계를 끌러달라고 했다. 나중에 강병욱 씨가 가지고 올라가게 하겠다고. 한동안 머뭇거리던 그녀는 결심이 선 듯 대답 대신 시계를 끌러서 내밀었다.

나는 옥상에서 내려오자마자 강형에게 시계를 건네주며 경과보고를 했다. 그리고 10시에 옥상에 올라가보라고 했다. 내가 강형과 한참 얘기를 하고 있는 사이, 마루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으니 놀랍게도 그녀였다. 그녀도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까 옥상에서 만났던 분이죠? 생각해 보았는데 그분은 만나고 싶지 않아요. 저는 햄릿보다는 돈키호테가 좋아요. 지금 전화 받는 분이 10시에 제 시계 가지고 올라오세요.”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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