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뿐인 평화유지군, UN에 침을 뱉다
허울뿐인 평화유지군, UN에 침을 뱉다
  • 박정필 기자
  • 승인 2007.06.05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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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재발견] <노 맨스 랜드> & <호텔 르완다>

<노 맨스 랜드>와 <호텔 르완다>를 통해 본 UN을 고발하다 

전쟁은 참 아프다. 사람들이 죽는다. 간단한 손가락 까딱임으로도 앞으로 50여년의 가치가 있을 한 육신이, 여러 육신들이 소멸된다. 너무도 간단하고 죄책감도 없다. ‘그들과 나는 적이고 그들은 나를 죽이기 위해 존재한다’라는 전제 아래 인간은 무서울 정도의 침착함으로 상대방을 쏜다. 가진 자들의 놀이터에서 덜 가진 자들은 가진 자들을 위해 서로를 죽인다.

▲ 노맨스랜드
본 기자는 전쟁 영화를 볼 때면 늘 이념과 종교, 힘과 권력 등 인간의 도구가 되어야 할 것들의 도구가 되어 가는 인간군상의 어리석음에 주목해왔다. 그리고 인간 본연의 생명존중이라는 절대가치가 배제될 수밖에 없는 그런 무의미한 이권다툼에 분노해왔다. 하지만 얼마 전에 본 두 편의 독특한 전쟁 영화에서 새로운 분노의 대상을 찾았다. 바로 <노 맨스 랜드>와 <호텔 르완다> 속 UN이 그 대상이다.

<노 맨스 랜드>는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나(세르비아)간의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로 우리나라의 DMZ와 같은 중립 무인지대에 갇히게 된 보스니아 병사 2명과 세르비아 병사 1명의 황당무계한 구출작전을 그리고 있다. 감독은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이 황당한 상황을 관조하듯 보여주지만 그 안에 의미 있는 칼날을 숨겨놓아 관객들의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 피를 덜 보이면서도 전쟁의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묘한 매력이 있는 영화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과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깐느 영화제 각색상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호텔 르완다>는 르완다 내전 당시 실제 있었던 사건을 재구성한 영화로 오랜 시간 대립하던 후투족과 투치족의 살육전쟁 속에서 피어난 휴머니즘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개미떼를 밟아 짓이기는 듯 한 전쟁터 속에서(실제로 르완다 내전 당시 100일 동안 100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한 남자가 1200여명의 난민을 목숨 걸고 지킨다는 내용으로 과연 아프리카판 <쉰들러 리스트>라 할 만 했다.

평화유지군, “세계 평화란 가면 쓴 강대국의 꼭두각시 인형일 뿐”

▲ 호텔 르완다
그렇다면, 왜 본 기자는 위의 두 영화를 보고 UN에 대해서 분노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영화 속에 보이는 UN의 모습이 그동안 우리가 인식하고 있던 United Nation과 무척이나 다르기 때문이었다. UN은 찬사 받아 마땅한 세계 평화를 위한 조직이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식량을 주고 약자를 강자의 무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암행어사였다. 세계에 전쟁이라는 부조리한 상황이 발발하지 않게, 발발하더라도 하루 빨리 종식 될 수 있게 하는 힘 있는 까치 재판관이었다. 아니,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 맨스 랜드>속의 UN은 가소롭다.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언론 보도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상황을 자기 유리한데로 꾸며내는 한편, “노력하고 있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입에 발린 소리뿐이다. 심지어는 죽음의 위기에 처한 병사를 방치하고 도망치기까지 한다.

<호텔 르완다> 속의 UN은 더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군대이며 누구를 위한 중용이란 말인가. 영화 속 UN은 참혹한 살육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 편도 들 순 없다”며 백인들만을 태운 버스를 타고 인간도살장에서 도망치듯 떠난다. 삶의 끝자락에서 한 뼘도 안 되는 목숨을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남아보려는 ‘블랙 피플’들의 아우성은 그들에게 말 그대로의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이다.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던 강대국들은 서로간의 이해관계를 따질 뿐이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에 침묵으로 일관한다. 필자는 이 영화가 겨우 10여 년 전 실화를 토대로 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 <노맨스랜드>의 한 장면. 영화속의 하늘색 군모는 평화의 상징이 아닌 "난 중립이니 날 해치지 마시오"라는 상징으로 느껴진다.
두 영화를 보면서 현실을 껌처럼 짓밟아 비비는 명분이란 것에 구역질이 났다. 또한 허울뿐인 평화유지에 침을 뱉고 싶었다. 그들이 쓰고 있던 하늘색의 군모는 평화의 상징이 아니었다. “난 중립이니 나를 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그저 눈에 잘 띄는 방패인 것이다. ‘세계 평화 유지군’이란 결국 세계 평화란 가면을 쓴 강대국들이 흔들어 대는 실에 매달린 꼭두각시 인형일 뿐이다.

물론 <노 맨스 랜드>와 <호텔 르완다>는 영화라는 매체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모든 UN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세계 평화와 공익보다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성급히 일반화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현실 역시 별다를 게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몇몇 탐관오리의 논리에서 공익은 항상 개인의 안위 밑에 깔려있다. 가진 자들이 믿는 진리란, 맬서스의 자본주의 이론(기아는 지구의 포화를 방지하기 위한 자정작용이다)처럼 ‘어쩔 수 없음’ ‘자연의 섭리’를 전제하기 마련이고 그런 잔인한 자위 속에서 못가진 자들은 지쳐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어간다. 이는 물론 영화 속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인 것이다.

▲ <호텔 르완다>의 한 장면, 그들은 죽음의 위기에 닥친 난민들을 버려두고 본국으로 귀환한다.
하루빨리 UN을 비롯한 국제협력기구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구촌으로 돌아와 자신의 자리에서 요구되는 것들의 본질을 찾길 바란다. 체면치례에 열을 올리기 보단, 스스로 개입하기 전에 “확실히 해결 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약한 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는 이 세계가 조금 더 살기 좋은, 살만한 곳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글은 어디까지나 본 기자의 매우 주관적인 감상평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두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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