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비
봄 비
  • EPJ
  • 승인 2010.03.1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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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19)

“과장님, 전화 받으세요. 여자 분인데요.”

봄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나른한 하오의 상념에 잠겨있던 그는 미스 윤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다시 돌아앉아 책상 위의 수화기를 들었다.

“장병주입니다.”
“오빠. 저, 부산의 선희예요.”

선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모두 심장으로 모이는 듯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화에 어안이 벙벙해진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선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긴 서울 잠실이에요. 동생 집에 와있어요. 오늘 저녁에 만났으면 해요. 보고 싶어요.”
옛날 목소리 그대로였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지하철을 타고 강남역으로 와. 8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옆에 ‘부메랑’이라는 레스토랑이 있어. 여섯 시에 그리로 갈께.”

전화를 끊고 나자 10년 전의 회한이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는 옆방 회의실로 가서 혼자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선희는 그에게 쓰라린 한을 심어주고 떠난 여자였다. 두 사람은 한 마을에서 태어났고, 그 보다 두 살이 적은 선희는 그를 오빠라 부르며 어린 시절을 함께 자랐다.

그가 군에 있을 때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가 제대를 해서 고향에 올 무렵 두 사람의 사랑은 한껏 무르익어 있었다. 매일 밤 동네사람들의 눈을 피해 마을 뒷산기슭에서 만났었다.

그해 겨울, 고향에서 전문대학을 졸업한 선희는 취직이 되어 부산으로 떠났다. 그가 2학년에 복학하기 위해 서울로 떠나기 전날 부산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해운대의 한 여관방에서 창문 앞에 나란히 꿇어앉아 달님을 보며 장래를 약속했다. 그날 선희는 그의 팔베개를 베고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서울로 떠났다.

3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 선희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집에서 결혼을 서두르고 있다는 거였다. 상대는 재력을 갖춘 청년사업가로, 문학에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가난한 영문학도인 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은 신랑감 같았다.

그 사람과의 혼담이 무르익어 갈 무렵, 선희는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가 방학해서 고향에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고향 읍의 찻집에서 만났고 선희는 그의 팔에 매달리며 애원했다.

“절 보내 주세요. 원한다면 오늘밤에 오빠 곁에 있겠어요.”
선희의 마음이 돌아서 버린 것을 확인한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야, 끝까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고 싶어. 그 사람과 행복하게 살아. 우리 10년 후에 만나지. 그땐 애들도 어느 정도 컸을 테니까. 만날 여유가 있겠지.”

울먹이는 선희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방안에서 전축을 크게 틀어놓고 미친 듯이 춤을 추며 미어지는 가슴을 달랬다.

선희의 결혼식 날 그는 영화 ‘졸업’에서의 더스틴 호프만처럼 식장에서 신부를 빼앗아오는 상상을 하며 낮술을 잔뜩 마셨다. 그러나 끝내 선희의 예식장에는 가지 못했다. 그날 밤 그는 창녀 집을 찾아가 이십육 년 동안 간직해 온 동정(童貞)을 바쳤다.

그로부터 일 년 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 회사에 공채로 입사, 이제 중견간부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그 동안 그도 결혼을 하고 두 아이가 모두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선희에 대한 기억은 증오심과 그리움이 뒤섞인 채 그를 끈질기게 쫓아다녔다. 그 동안 여동생 경미를 통해서 간간이 소식을 듣고 있었다. 선희의 여동생이 서울로 시집을 왔다는 것과 선희에게도 두 아이가 있으며 부산에서 살고 있다는 것….

드디어 10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는 선희의 전화번호를 알아보려고 경미에게 몇 번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올케를 배려한 경미가 한사코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혼자만의 추억으로 가슴속에 간직하리라고 마음을 고쳐먹은 터였다. 그런데 오늘 선희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6시경 ‘부메랑’에 들어섰다. 먼저 와있던 선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빠는 옛 모습 그대로군요.”
“선희도 그대로인 걸.”

그렇게 말해주었지만 선희의 얼굴에는 분명 10년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때의 앳된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중년여인의 티가 났다.

“작가가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직장생활을 하신다니 놀랐어요.”
“선희가 떠나고 난 뒤 진로를 바꿨지. 그러나 아직 문학에의 꿈을 버리진 못했어. 직장생활 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고 있지. 참, 부군의 사업은 어때? 서울엔 어떻게 오게 됐지? 아이들 방학 때도 아닌데….”

“사업은 그럭저럭 꾸려가고 있어요. 서울 동생 집에 일이 있어 어제 올라왔어요. 아이들은 시어머니에게 맡겨놓고. 내일은 내려가야 해요. 오늘 동생 집에서 전화로 경미에게 떼를 써서 오빠의 전화번호를 알아냈어요. 그래서 아까 전화를 했던 거예요.”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열 한 시가 넘어있었다. 그가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자 선희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오빠를 만나려고 올라왔어요. 용서를 받고 싶었어요. 저 오늘 집에 안 들어가도 돼요.”
선희의 목소리가 흐느낌으로 바뀌고 있었지만 그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이제 와서 용서라니…. 우리들 자신이 택한 길인데. 우리가 오늘 함께 밤을 새우게 되면 3류 소설이 되고 말아. 난 우리가 그렇게 되는 걸 원치 않아.”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탔다. 선희의 동생 집 아파트 입구에서 차를 세웠다. 선희가 내리자, 그는 기사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우산을 펼치고 서있는 선희를 힘껏 껴안았다. 선희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잘 가.”
그는 선희의 귀에다 속삭이고 곧 뒤돌아서서 그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헤드라이트 불빛 사이로 빗줄기가 어지럽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마음도 차츰 젖어 들고 있었다.

◇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에는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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