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소매 환상곡(Greensleeves)
푸른 옷소매 환상곡(Greensleeves)
  • EPJ
  • 승인 2010.01.13 15: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용현의 꽁트 마당 ⑰

막 점심 먹으러 나가던 고 대리는 갑자기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곡이 천장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함께 나가던 직원들에게 ‘먼저 가라’고 말하고 다시 자리에 와서 앉았다. 미스 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미스 장을 알게 된 것은 1년쯤 전이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최신식 22층 건물인데,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낮 12시만 되면 천장에 있는 스피커에서 경음악이 흘러나온다. 작년 가을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동료들과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본 윌리암스의 ‘푸른 옷소매 환상곡(Fantasia on Greensleeves)’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곡은 그를 구름 위에 올라앉은 듯한 환상에 빠져들게 하던, 그가 아주 좋아하는 곡이다. 특히 시작 부분을 들을 때 그랬다. 그 곡이 끝나자마자 방송실에 전화를 걸었다. 음성만 듣고도 반할 정도로 목소리가 고운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대뜸, 아까 들려주었던 ‘Greensleeves’를 점심시간 첫 곡으로 틀어줄 수 없느냐고 말했다. 점심 먹으러 나가기 때문에, 중간에 틀면 들을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알겠어요’가 그가 얻어낸 대답의 전부였다.

이틀 후 점심시간 첫 곡으로 그 곡이 나왔고 그날 두 사람은 퇴근 후 회사 근처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미스 장 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 후부터 ‘Greensleeves’는 두 사람만의 암호가 되었다. 퇴근 후 거기서 만나자는….

그 곡이 첫 곡으로 나오는 날은 어김없이 만났다. 그렇게 시작하여,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급기야 인천 월미도에서 함께 밤을 새웠고 그 후에도 둘의 교제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지난 봄, 고 대리가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괜찮은 집안의 딸과 선을 보고 서둘러 결혼을 하는 바람에 둘 사이에도 종말이 왔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그는 미스 장을 만나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행복하게 사세요’ 하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떴다. 그날 이후 그 건물에 입주해 있는 사람 중에 점심시간에 ‘Greensleeves’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결혼한 지 8개월이 지난 오늘 다시 ‘Greensleeves’가 점심시간 첫 곡으로 나온 것이다. 그는 오후 내내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메모지에 낙서만 하며 멍하게 앉아있었다.

있다가 거기로 갈 것인가? 아니지, 이제 와서 만나봐야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는 요즘 슬럼프에 빠져있다. 며칠 전, 아내와 대판 싸운 후 계속 아침도 못 먹고 출근하고 있다. 친정으로 가버린 아내는 아예 소식도 없다. 한 달쯤 전에는 아내가 친정에 가버리자 검사인 큰처남한테서 ‘자넨 마누라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왜 그 모양이야?’ 하는 문책성 전화가 오기도 했다.

요즘 그는 매일 술을 마시고 밤늦게 집에 들어간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오자 오늘은 또 누구하고 마실까 싶어 핸드폰 번호를 뒤적거렸다. 신림동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는 고향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선약이 있다며 다음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는 퇴근하자마자 그 레스토랑으로 갔다. 미스 장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주 앉았다. 둘 다 말이 없었다. 칵테일을 연거푸 들이키던 미스 장, 실눈을 뜨고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신혼재미에 빠져 나 같은 여자는 아예 생각도 안 나겠죠?”
그는 대답대신 또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저녁을 먹으며 계속 칵테일을 들이키던 미스 장은 기어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깨어나지 않자, 미스 장을 부축하여 밖으로 나왔다.

거리엔 온통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젊은 연인들이 짝을 지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가까운 모텔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위에 그녀를 뉘었다. 갑자기 그녀가 ‘가지 마!’ 하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한데 엉켰다. 그녀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두 사람은 격렬하게 서로를 탐했다. 한 차례 격랑이 지나가자 그녀가 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들썩이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누워있었다.

그녀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그는 옷을 입었다. 그리고 ‘미안해, 먼저 간다.’는 메모를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매서운 눈보라가 얼굴을 때렸다. 술기운 때문인지 발걸음이 뒤뚱거렸다. 그는 택시를 잡으려고 거리 한가운데로 나와‘목동! 목동!’ 하고 연신 고함을 질렀다. 택시 하나가 옆에 섰다. 그는 뒷좌석에 앉자마자 뒤로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그는 길바닥 보도 위에 쓰러져 있었다. 주위는 온통 암흑천지였다. 온몸이 얼어붙은 듯 떨렸다. 여기가 어딘가? 어떻게 된 일인가?

정신을 가다듬고 살펴보니 그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입구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그의 지갑이 코앞에 떨어져 있었다. 신용카드는 그대로 있었지만 현금은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서 그의 집까지는 걸어서 7~8분,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두 다리가 마른 동태처럼 뻣뻣했고 온 몸이 오슬오슬 떨렸다. 오른쪽 다리가 몹시 욱신거렸다. 따뜻한 아랫목 생각이 간절했다. 갑자기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집 가까이 와서 올려다보니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벨을 눌렀다. 문이 금방 열렸다. 아내가 와 있었다. 밤새 자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안방에 들어서자마자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한숨 자고 일어난 그는 오랜만에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고 늦게 출근했다. 아직도 온몸이 얼얼했다.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 봐도 어젯밤 모텔에서 나와 택시를 탄 것까지만 기억이 났다. 택시에서 강도를 당한 것일까? 아니면 정신 없이 곯아떨어진 그를 운전기사가 차 밖으로 내팽개친 것일까?

어쨌든 이 정도로 끝났으니 천만다행 아닌가. 그는 급한 서류를 마무리해서 과장 책상에 올려놓고 다시 자리에 와 앉았다. 천장에서 막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Greensleeves’였다.
그는 더 이상 자리에 앉아있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에는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