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대교에서
서해대교에서
  • EPJ
  • 승인 2009.11.09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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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 ⑮

해마다 10월 초에 군산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동서 댁에 밤 따러 가곤 했었는데 올 가을엔 부쩍 심해진 편두통 때문에 가지 못했다. 지난주에 군산 처제한테서 ‘밤은 다 따고 없으니 고구마 캐러 와요.’ 하는 전화가 왔었단다.

나는 인천에 사는 작은동서한테 이번 주말에 군산에 가자고 전화를 했다. 토요일 내려갈 때는 호남고속도로 쪽으로 가고, 일요일 올라올 때는 서해안고속도로로 올라오기로 했다. 토요일 저녁 8시쯤 출발했는데 동서 댁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넘어있었다. 우리는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시며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아내와 처제들이 태양초 고추를 다듬는 사이, 나와 동서들은 집 뒤 고구마 밭으로 올라갔다. 서리를 맞아 축 늘어진 고구마 줄기와 잎을 군산 동서가 낫으로 긁어냈다.

“이 쪽 두 고랑은 밤고구마, 저 쪽 두 고랑은 호박고구마, 가운데 고랑은 모두 물고구마랑게. 맛은 호박고구마가 최고랑게.”

군산 동서가 몇 번 호미질 시범을 보이고는 비닐하우스에 갔다 오겠다며 내려갔다. 나와 인천 동서는 군산 동서가 가르쳐준 대로 고구마를 캤다. 토질이 좋아서인지 호미가 한 번 지나간 자리에 고구마가 엄청 나왔다. 좀 있으니 아내와 인천 처제가 올라왔다. 군산처제는 고추를 빻으러 방앗간에 갔단다.

고랑 끝 부분에서 희끄무레한 물체가 보였다. 살살 뽑아보니 덩어리가 따라 나왔다. 잔주름이 많았고 실 같은 잔뿌리가 여럿 붙어있었다. 분명 고구마는 아니었다.

내가 ‘어! 이게 뭐지?’ 하고 그놈을 번쩍 쳐드니 모두들 다가왔다. 인천 동서가 ‘형님, 혹시 산삼 아닙니까?’ 하고 말했다.

모두 잔뿌리를 하나씩 떼어 껍질을 까고 씹어보더니 처제와 아내는 야생도라지 같다고 했고 동서는 더덕 같다고 했다. 나도 잔뿌리를 떼서 씹어보았다. 쌉싸름한 맛이 났다. 쏘는 듯한 매콤한 맛도 혀끝에 맴돌았다. 또 다른 잔뿌리를 떼서 씹어 보았다. 마찬가지였다.

이름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귀한 약재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인천처제가 말했다.

“형부, 10년 묵은 야생도라지는 산삼보다 더 좋대요. 가실 때 언니한테 토종닭이나 한 마리 얻어가요. 이거 넣어서 푹 고와 드셔보세요. 형부 몸도 안 좋으신데….”

“그러세요. 형님, 처형님이 어디다 넣어두세요. 군산 형님이 보면 내놓으라고 할 거요.”

인천 동서가 맞장구를 쳤다. 내가 밭고랑 둑으로 던져놓자 아내가 빙그레 웃으며 비닐봉지에 담았다. 다시 고구마를 캤다. 한참 있으니 군산 동서가 경운기를 몰고 왔다. 남은 고랑을 단숨에 갈았다. 밭고랑 옆으로 고구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더러는 토막이 나기도 했지만. 우리는 경운기를 따라다니며 고구마를 주워 밭고랑에 모았다.

“이 호박고구마는 맛이 끝내준당께.”군산 동서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우리는 밭고랑에 모아둔 고구마를 모두 가마니에 담았다. 상처가 난 고구마는 사료로 쓴다며 따로 모았다. 모은 가마니를 경운기에 싣고 집 앞 마당으로 내려왔다. 군산 동서가 한사코 우리 차에다 한가마니씩 넣어주었다. 군산 처제가 점심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가 넘어있었다. 대충 씻고 점심을 먹었다. 땀 흘려 일한 탓인지 밥맛이 꿀맛이었다. 밥 한 공기를 더 먹었다. 두 시가 조금 넘어서 출발했다. 서천까지는 서해안고속도로를 탔지만 서천에서 당진까지는 21번 국도를 탔다. 중간 중간에 확장공사를 하는 탓에 차가 많이 막혔다.

보령을 지나 홍성쯤에 접어들 무렵 해가 지고 금방 어둑어둑해졌다. 갑자기 속이 매스꺼워지기 시작했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나? 당진을 지나 서해대교에 진입할 무렵에는 구토가 나오려고 했다. 머리도 지끈지끈 아팠다. 토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드디어 서해대교에 진입했다.

시원한 6차선 교량이 끝없이 뻗어 있었고 가로등 불빛 아래 차들이 시원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교량 중간쯤 아치가 있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차를 3차선에 세워놓고 다리 아래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속이 뒤틀리면서 구토가 올라왔다.

나는 토하지 않으려고 입을 꽉 다물었다. 서있는 차들 사이에 차를 세우고 급히 교각 쪽으로 갔다. 바다를 향해 험한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점심 먹은 게 모두 다 나온 것 같았다. 나중에는 신물이 나왔다.

입안에 쌉싸래한 맛이 맴돌았다. 아, 그 맛이었다. 아까 고구마 밭에서 캔 그 도라지인지 더덕인지…. 나는 갑자기 생각이 나서 아내에게 물었다.

“아까 그 약초뿌리 어떻게 했어?”

“뒤 트렁크에 실었어요. 그거 때문인 것 같아요? 하긴 나도 속이 좀 메스꺼운데….”가만히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들은 잔뿌리를 약간 맛만 봤는데 나는 서너 번 씹어 먹은 생각이 났다.

“맞아, 그것 때문이야. 군산에 전화해봐야겠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처제가 받았다. 나는 서해대교 위에서 구토를 하고 있다고 말하고 고구마 밭에서 캔 그 도라지(?) 설명을 했다. 처제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형부 그거 도라지 아니어요, 그거 우리 밭에 꽤 있는데 투구꽃 뿌리예요, 백부자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임금이 내리는 사약 만드는데 쓰는 약재예요. 그거 많이 먹으면 죽어요. 형부, 얼마나 먹었어요? 먹은 거 다 토해 내요. 얼른….”

전화가 뚝 끊어졌다. 나는 손가락을 입에 넣고 다시 왝- 왝- 하며 진액 한 방울까지 다 토했다. 아내가 내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약이라는 말이 자꾸만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아내가 트렁크에서 꺼내온 그것을 다리 아래로 냅다 던졌다. 다리 저 아래에는 가로등 불빛을 받은 바다가 누렇게 일렁이고 있었다.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에는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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