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에 찍힌 여자
홍시에 찍힌 여자
  • EPJ
  • 승인 2009.10.0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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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⑭

군에서 제대를 하고 복학한 후부터 매년 겨울방학 때 고향에 내려오기만 하면 친척들의 중매공세에 시달려 온 조병태 씨. 스물여섯 살에, 그것도 아직 졸업이 일 년이나 남은 상태에서 결혼을 한다는 것은 그로서는 도무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작년 겨울방학 때는 먼 친척 아저씨의 집요한 권유로 한 번 선을 보러 부산에 간 적이 있었다. 상대는 미술을 전공한 아가씨로 제법 큰 사업체를 운영하는 딸 부잣집의 맏딸이었다. 아버지가 하는 사업을 맏사위가 도와줘야 할 처지이기 때문에 부모들이 빨리 결혼을 시키려고 안달이라고 했다.

조그만 화실을 차려놓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기다란 손톱에 보라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는데 그것이 눈에 자꾸 거슬렸다. 그 아가씨도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서로 같은 처지여서 두 사람은 이런 저런 얘기만 나누다가 일어섰다. 그 싱거운 만남이 조병태 씨가 난생 처음 본 맞선이었다.

올해는 겨울방학 때 그가 시골집으로 내려오자마자 이웃 면(面)에 사는 이모가 마치 방학을 기다리기나 한 듯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와서 이모네 마을에 아까운 처녀가 한 사람 있으니 꼭 한번 만나보라는 거였다. 이곳 읍에서 전문대학까지 다녔는데 학교를 졸업한 후엔 줄곧 농사일을 거들며 집에서 살림만 하고 있단다.

인물도 좋고 심성이 고와서 주위에서 모두들 탐을 내고 있는 처녀란다. 나이가 스물여섯이어서 시골처녀치고는 나이가 좀 많은 게 흠인데, 그것은 바로 위의 오빠가 먼저 결혼한 뒤에 하려고 기다리다가 그렇게 된 것이란다.

작년 겨울에 오빠가 결혼을 했기 때문에 올 겨울에는 꼭 시집을 보내겠다고 집에서도 서두르고 있단다. 어릴 때부터 쭉 보아왔는데 정말 남 주기 아까운 처녀라고 이모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병태의 부모들도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결국 병태는 그 처녀와 맞선을 보기로 약속을 했다.

맞선 날, 병태는 어머니와 함께 약속한 다방으로 갔다. 얼마 안 있어 이모께서 그 처녀, 그 처녀의 어머니와 함께 들어왔다. 그 처녀가 멋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이모의 등 뒤로 따라 들어오고 있었는데, 얼핏 보아도 이런 촌구석에 저런 처녀가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상당한 미인이었다. 편안한 느낌을 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끌리는 데가 있었다.

곧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에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혼자 기억을 더듬다가, 중학교를 어디 다녔는지 물어보았다. 혹시 그때 본 적이 있는가 싶어서였다. 읍내의 OO여중을 다녔단다.

그가 안면의 끈을 찾아 기억 속을 헤매고 있을 때, 그녀가 느닷없이 ‘중학교 때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했는지’ 물었다. 그가 ‘그렇다’고 하자, ‘혹시…?’ 하며 이야기 하나를 꺼냈다.

“우린 그때 매일 십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어요. 그때는 버스 타기도 힘들었잖아요. 중 2때 가을이었어요. 하교 길에 친구들과 함께 걷고 있는데, 신촌 마을 좀 못 왔을 때 자전거를 타고 오던 남학생 셋이서 뒤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중 갑자기 그가 ‘잠깐요’ 하며 말을 잘랐다. 번개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가는 기억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가을 무렵이었다. 하교 길에 두 친구와 함께 셋이서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는데 저 앞에 OO여중 교복을 입은 여학생 셋이서 걸어가고 있었다. 마침 길옆 퇴비더미에 너무 익어서 물러진 홍시 여러 개가 버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를 보고 장난끼가 발동한 세 악동, 홍시 한 개씩을 주워서 여학생들에게 던지기로 했다. 병태는 중간에 서있는 키 큰 여학생을 맡았다. 살금살금 페달을 밟으며 여학생들 뒤로 다가간 그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동시에 홍시를 던졌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이 던진 홍시는 모두 목표물을 벗어났는데 병태가 던진 홍시는 중간 여학생의 등에 정확히 맞았다.

‘엄마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논으로 뛰어드는 여학생들을 뒤로하고 세 악동은 죽어라고 페달을 밟았다. 가만히 생
각해보니 두 사람은 모두 일부러 목표물(?)을 살짝 비켜서 옆으로 던졌는데, 그 혼자만 고지식하게 똑바로 던졌던 것이었다.

그 뒤부터 그 여학생은 늘 하얀 교복 블라우스 등 부분에 거무스레한 감물자국을 달고 다녔고, 그는 그 옷만 보면 괜시리 얼굴이 화끈거려서 부리나케 페달을 밟아 도망치곤 했었다. 그 스토리를 아는 친구들이 저 여학생은 너한테 찍혔으니 니꺼다(?)고 놀려대곤 했었다. 그해 겨울, 그는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다.

하얀 교복을 입은 여중생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 위에 겹쳐졌다. 그 앞에 앉아있는 그녀가 바로 그가 던진 홍시에 맞았던 그 여학생이었던 것이다.

“예, 맞아요. 제가 그랬어요. 정말 아찔한 추억입니다. 살짝 옆으로 던졌어야 하는 건데…. 그땐 정말 순진했나 봐요.”병태가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그날 아버지한테 혼이 났다고 했다. 평소에 어떻게 하고 다니 길래 남학생들이 그렇게 했겠느냐며. 홍시자국을 씻으며 너무너무 억울해서 그날 밤새 울었다고 했다.

그 후, 어떤 작자인지 얼굴이나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친구들을 통해 알아봤더니 부산으로 갔다고 하더란다. 요즘도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들을 보면 얼굴도 모르는 그 남학생이 생각나곤 한다며 그녀가 다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혼담이 나올 때부터 이름이 낯설지 않아서 혹시나 했는데, 정말 그 학생이었군요. 정말 희한한 인연이네요.” 바깥에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있을 무렵,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다방을 나서고 있었다.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최용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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