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종친회
어떤 종친회
  • EPJ
  • 승인 2009.09.08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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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마당⑬

그날 내가 외박을 한 것은 퇴근길에 재경(在京) ‘OO채(蔡)’ 씨 종친회에 참석하러 종로에 나갔던 것이 발단이었다. 종친 어른들이 사, 오십 명 정도 모여 있었다. 채 씨는 본(本)이 하나이므로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일가요 친척인 셈이었다. 그날 받은 명함이 스무 장도 넘었다.

편치 못한 자리였다. 간혹 사십대 중반의 또래가 있어 인사를 하고 보면 이번에는 항렬이 같지 않아 말하기가 거북했다. 명함만 보면 위 항렬인지 아래 항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어릴 때 친구였던 용범이를 만날 줄이야! 용범이는 집안으로 치면 먼 친척이었으나, 그보다는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같이 다닌 절친했던 친구였다. 우리 옆 동네에 살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용범이네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헤어졌는데, 거의 30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우리는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고, 재회의 기쁨으로 잡은 손을 한동안 놓을 줄 몰랐다. 군에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재작년에 전역을 했고, 지금 영등포 부근에서 조그만 플라스틱 공장을 운영하고 있단다. 종친회장이 인사말씀을 하고 종친회 사업계획을 설명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기에 바빴다. 결국 우리는 그 자리를 탈출하기로 의기투합, 몰래 밖으로 빠져 나왔다.

길거리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그 동안 살아온 얘기, 고향 얘기, 초등학교 때 동창들 얘기….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9시가 넘었을 때, 어느새 소주 세 병이 비어 있었다. 우리는 다시 근사하게 한 잔 하기로 하고 택시를 탔다.

이태원에서 내려 한 나이트클럽에 들어갔다. 거기서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두 아가씨와 우연히 합석하게 되었다. 옷차림새나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직장여성 같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파트너를 정해서 나란히 앉았다.

‘김이예요’ 하고 자신을 소개한 용범이의 파트너는 세련되고 발랄한 도시여성 타입이었는데, 붙임성도 있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했다. ‘최예요’ 하며 내 옆에 앉은 아가씨는 약간 큰 키의 글래머였는데, 말수는 적었으나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그 아가씨들은 아주 부담 없이 우리를 대해 주었다. 가끔 이런 곳에 온다고 했다. 맥주 실력은 보통이 넘었고, 춤 솜씨는 흔히 보는 정도의 초보자 수준이었으나 주저하거나 뒤로 빠지는 일은 없었다.

어설픈 몸짓으로 블루스를 함께 추면서, 파트너에게 내 애인이 되어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밉지 않게 살짝 웃을 뿐 대답이 없었다. 맞닿은 가슴에서 뭉클한 촉감이 짜릿하게 퍼져왔다. 내 몸 속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네 사람은 죽이 잘 맞았다. 우리는 자리를 옮기기로 의기투합, 함께 나이트클럽을 나왔다. 어느새 11시가 넘어 있었다. 택시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강변도로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 불빛이 강물에 잠겨있는 모습이 처연하게 아름다웠다.

네온사인 불빛이 휘황찬란한 거리에서 내렸다. 그리고 신사동, 그 불야성의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열두 시가 가까워질 무렵, 우리는 맥주 몇 병을 사들고 가까운 모텔로 들어갔다. 아가씨들도 순순히 따라 들어왔다. 너무 쉽게 따라왔으므로 오히려 용범이와 내가 더 긴장하고 있었다. 모두 맥주를 많이 마시긴 했으나 그렇게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각자 알아서 나가기로 하고 두 방으로 나뉘어 들어갔다. 낯선 방에서 파트너와 단둘이 되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리, 이상한 여자로 보이죠?”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두 사람은 대학에서 같은 과의 단짝이었는데 지금은 따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 달에 한두 번 만나서 같이 술도 마시고, 괜찮은 남자가 걸리면 함께 자기도 한단다.

“그럼, 우리가 괜찮은 남자들인가?”
내가 반문하자, 그녀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나이트클럽에 자주 오는 사람 같지는 않았고 둘 다 약간 촌스러워 보여서 따라왔단다. 인생관도 확실히 서있는 것 같았다.

“나쁠 거 없잖아요. 서로 부담 없이 마시고 즐기고. 시집가고 나면 이러지 못할 거 아니에요. 남자들이야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내가 샤워를 하고 들어와서 침대에 눕자, 그녀는 불을 끄고 돌아서서 옷을 벗었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알몸으로 내 옆으로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육감적인 몸매였다. 풍만한 두 가슴의 융기가 자못 도전적이었고, 허리에서 둔부로 이어지는 곡선의 볼륨이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그녀의 몸은 악기였다. 연주자의 손길에 따라 음악소리를 내며 뜨겁게 달아오르고, 연주자와 함께 스스럼없이 온 몸을 불사르는….

“훌륭한 몸이군. 언제 나갈 건가?”
격정의 순간이 지나가고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올려주며 나직이 말했다.

“그냥 이대로 잠들고 싶어요.”
아직 숨이 고르지 않은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이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심한 갈증을 느끼고 머리맡에 있는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정신이 좀 맑아져 왔다.

불을 켰다. 새벽 4시가 조금 지나있었다. 간밤의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종친회, 용범이, 포장마차, 나이트클럽, 그리고 내 파트너…. 주전자 옆에 노란 메모지가 보였다. 예쁜 글씨였다.

“먼저 갈게요. 참, 애인 되어달라고 하셨죠? 제 명함 두고 갈게요. 명함을 두고 가는 건 처음이에요. 아저씨의 눈빛이 좋아요. 어젯밤은 참 즐거웠어요.”
그 옆에 명함이 한 장 있었다. 잡지사 이름, 그리고 ‘편집부 채선희’ 라고 씌어져 있었다.

‘채’ 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최’ 라고 한 것 같았는데…. 나는 또 물 한 컵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 비 맞은 중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이런 종친회도 다 있군.’*

< 작가·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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