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주를 구합니다
물주를 구합니다
  • EPJ
  • 승인 2009.05.1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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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 ⑨

‘한 달에 200만원 달라고 해야지.’
임 실장의 전화를 받고 약속장소로 가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다짐을 했다. 임 실장은 우리 동네의 한 부동산 사무실 직원인데, 그가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어서 기회가 있으면 다른 데로 옮기려 하고 있었 다.

며칠 전, 그의 사무실에 놀러 갔을 때 내가 무슨 얘기 끝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고 하자 임 실장은 정색을 하고 말했었다.

“박 형, 자격증이 있으면서 취직은 뭐 하러 해요? 부동산 사무실을 차리세요. 아무리 불경기라 해도 수입이 월급쟁 이보다 훨씬 나아요.”
“돈이 문제죠. 사무실을 하나 얻으려면 몇 천만원이 든다고 하는데 그만한 돈이 있어야죠.”
내가 반문하자, 그는 물주(物主)를 한 사람 구하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도 합세할 테니 셋이서 한번 해보자면서 물주를 구하면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나더러 그 동안 부동산중개업협회에서 실시하는 교육을 받아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허가가 난단다.
지난주에 용산에 있는 협회에서 사흘 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어저께 임 실장에게서 물주를 구했다는 전화가 왔다.

강서구 가양동의 대단위 아파트단지 상가에 괜찮은 자리가 하나 있어서 그 사람과 함께 가서 계약까지 했단다. 보증금과 권리금으로 약 7천만원이 들었단다. 그 사람은 자기가 임 실장과 둘이서 근무하고, 자격증을 빌려주는 대가로 내게 월 50만원을 주겠다고 하는데 나더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격증만 빌려주면 불법일 뿐 아니라, 사업자등록증이 내 이름으로 되어 있으면 다른 곳에 취직을 할 수도 없으니 나도 일을 했으면 한다고. 임 실장은 다시 그 사람과 의논을 해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셋이서 만나서 결정을 하자고 전화가 온 것이다. 약속한 다방에 들어서니 임 실장과 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물주일 터이다. 임 실장이 그 사람 ‘한 사장’을 소개했다.

단단한 체구에 구릿빛 얼굴, 어딘지 모르게 거칠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어린 30대 후반으로 임 실장과 비슷했다.

어릴 때 서울에 와서 막노동, 트럭운전사, 이삿짐센터 일꾼, 야채장사, 슈퍼 등 안 해본 것이 없단다. 광명시에서 슈퍼를 5년 간 운영하면서 돈을 좀 벌었는데 이젠 좀 편하게 살고 싶어서 슈퍼를 정리하고 부동산에 뛰어들었 단다.

이번 토요일 잔금을 치르고 그 사무실을 인수한단다.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아는 사람도 있지만 임 실장이 하도 추천하기에 나를 택했단다. 한 사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내게 물었다.
“어떻게 대우를 해주었으면 좋겠는지 말씀해 보세요.”
나는 올 때 마음먹은 대로 단호하게 말했다.
“전 자격증만 있지 실무경험은 없어요, 하지만 배운다는 자세로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같이 근무하는 조건으로 월 200만원 정도 받았으면 해요.”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한 사장이 입을 열었다.
“처음이라 잘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실정입니다. 처음 3개월 간은 150만원, 그 다음부터는 200만원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우리 사무실의 대표이시니 출퇴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근무하시고요.”
“좋습니다.”

나는 대뜸 시원하게 대답했다. 토요일부터 출근하기로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동안 나는 임 실장이 적어주는 대로 허가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했다.

토요일 아침, 좀 늦게 출근을 했다. 한 사장과 임 실장이 사무실의 책상과 응접세트, 집기들을 새로 배치하고 있었다. 나는 판촉물과 세 사람의 명함을 도안, 인쇄소에 맡겼다. 허가서류는 모레 월요일 오전에 강서구청에 가서 신청하기로 했다.

임 실장이 부동산 매매계약서 용지를 한 묶음씩 한 사장과 내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한 사장이 그 용지를 책상위에 탁 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한문을 못 써요. 그래서 계약서가 필요 없어요.”

한 사장의 예기치 않은 행동으로 임 실장이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계약서 쓰는 거 별거 아니어요. 한글로 쓰면 되고. 안 그러면 숫자만 한문으로 써요. 필요한 글자는 제가 써드릴 테니 하루에 몇 번씩만 연습하세요.”

나는 백지 한 장을 꺼내 상단에다 한문으로 숫자를 쓰기 시작했다. 壹 貳 參 四 五 六 七 八 九 拾 佰 阡 萬 億. 다 쓴 종이를 한 사장에게 내밀려고 하는 순간, 한 사장이 또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요. 난 무식해요. 중학교 2학년 중퇴가 내 학력의 전부요. 그래서 나는 사무실에서 청소나 하고 손님 모시고 집이나 보여줄 생각인데 내가 꼭 계약서를 써야 됩니까?”
“……….”

그날 저녁,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계속 마음이 찜찜했다. 계약서를 못 쓴다고 해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한 사장이 짜증을 내는 게 맘에 걸렸다. 못 배운 데 대한 콤플렉스의 표출이었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TV를 보고 있는데 한 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집 가까이 커피숍에 와있다며 잠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커피숍은 한산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한 사장이 “미안한 말씀을 드리려고 왔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저녁 한 잠도 못 잤어요. 이런 저런 생각을 했는데 박 사장님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해요. 그 동안 교육도 받으시고 했으니 조그만 성의만 표시할게요. 미안해요.”

한 마디로 해고통보였다. 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괜찮다고 했다. 앞으로 잘 되길 빈다고 덧붙이면서 일어 섰다. 봉투는 안 받으려고 했으나 그가 한사코 따라오며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와 헤어져 아파트로 걸어오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출근 하루 만에 해고라. 정말 기네스에 오를 일이군.

<작가·(사)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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