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병 유감
일등병 유감
  • EPJ
  • 승인 2009.04.07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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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⑧]

더벅머리로 논산훈련소로 떠난 지 꼭 1년 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휴가를 나온 내가 조금도 들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했을 게다.

집에 도착한 첫날부터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 보니 날짜는 금방 지나갔고 어느새 귀대일자를 며칠 앞두게 되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생각이 났다. 휴가기간 동안 주민등록증을 갱신해 오라시던 중대장님의 말씀, 애인이 없으면 애인을 하나 구해 놓으라는 고참들의 말씀이….

여자한테 편지도 오고 또 면회도 오고 그래야 군대생활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며, 여자를 꼬실(?) 때는 절대로 첫 휴가 왔다고 하지 말고 말년 휴가 왔다고 해야 한다고 김 병장님이 친절하게 코치까지 해주셨다.

그러나 저러나 이대로 가다가는 애인은커녕 여자한테 말도 한번 못 붙여보고 귀대하겠는 걸, 그러면 고참들이랑 동료들이 날 우습게 생각할 텐데….

생각하면 할수록 군대에 들어오기 전에 애인 하나 만들어 놓지 못한 내 신세가 한심했다. 대학 일 학년을 마치고 입대했었다. 일학년 때 미팅도 몇 번 했으나 맘에 드는 파트너는 걸리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나 붙잡고 애프터를 신청하고 애인하자고 할 걸, 후회가 막심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군대생활 하면서 애인이 없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고참들의 연애편지를 대필해주는 일이었다.

내가 쓴 글이 전우신문에 몇 번 실리고부터 우리 중대에서 글 잘 쓰는 사병으로 소문이 나는 바람에 고참들 연애편지 대신 써주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애인 없는 사람이 남의 애인에게 연애편지 써 줄 때의 그 자괴감이란….

귀대일자가 바로 눈앞에 다가옴에 따라 나는 차츰 절망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결국 귀대일자를 꼭 하루 앞두고 주민등록증을 갱신하러 면사무소에 갔다.

그때가 주민등록증 갱신기간이라 그런지 민원창구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다. 나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늘이 무심치 않았는지 거기서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한 여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한 사람 건너 앞에 서있는 여자. 그 여자가 힐끔 뒤돌아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훤칠한 키, 엷은 하늘색 코트, 길게 늘어뜨린 머리, 창백하리만큼 하얀 얼굴, 이지적인 까만 눈…. 한 마디로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월척이다!’ 나는 혼자 가만히 쾌재를 불렀다.

일을 끝내자마자 밖으로 뛰어나오니 그녀가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버스에 오르는 그녀를 따라 나도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시내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옆에 붙어 결사적(?)으로 말을 건 보람이 있어 우린 종점에서 함께 내렸고, 처음 만난 사이답지 않게 웃으며 함께 카페에 들어서고 있었다.

안주희. 우리 면에서 태어나 이곳 **여고를 졸업했으며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 2년 남짓 되었단다. 주민등록증을 갱신하려고 일부러 휴가를 내 고향에 왔으며 며칠 후에 상경할 것이라 했다.
고향에 온 김에 친구들이나 만나볼까 하고 시내에 나온 것이란다.

내 나이 또래의 초등학교 동창들이 주희의 여고 동창인 것으로 보아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 서울의 오빠 집에 기거하고 있는데, 오빠가 군에 장교로복무하고 있어 군대얘기를 자주 듣는다고 했다. 소설 속의 히스클리프를 좋아한다고 했다.

우린 점심 먹는 것도 잊고 서로의 이야기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휴가 올 때 김 병장님한테서 교육받은 대로 거짓말을 했다. 마지막 휴가를 왔으며 내년 봄에는 제대를 한다고. 그때 나는 사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내 말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내가 근무하는 부대의 약도를 그려주고, 서울에 가면 부대로 꼭 면회를 오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날 우린 제법 연인처럼 헤어졌다. 그날 밤 나는 한 잠도 이루지 못했다. 드디어 귀대 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마음이 다시 천근만근 무거워졌으나 주희가 부대로 면회 올 것이라 생각하니 다시 힘이 솟았다.

상경길 기차 안에서도 온통 주희 생각뿐이었다. 내가 귀대를 한 후 고참들에게 주희를 만난 이야기를 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들은 고참들은 주희가 면회를 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 정도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는 여자가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주희가 온다고한 약속을….

내가 면회 왔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귀대한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화창한 토요일 오후였다. 면회 온 사람이 여자라는 말을 듣고 나는 주희임을 직감했다. 사실, 귀대한 날부터 여태까지 토요일이 올 때마다 애를 태우고 있었다. 드디어 그녀가 면회를 온 것이다.

나는 외출 때 입기 위해 옷장에 고이 모셔 놓은 군복에다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도록 닦아놓은 군화를 신고중대장님으로부터 외박증까지 받아 쥐었다. 면회실까지 뛰어가면서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주희와 함께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영화도 보고 저녁도 함께 먹고, 어두워지면 한강 둔치에 가서 분위기를 잡고 다가가서….

면회실에 들어서니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한 여자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희였다. 귀대한 그날부터 단 하루도 주희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있었던가. 훈련이 힘들 때도 그랬지만 밤늦게 보초를 서거나 불침번을 설 때는 더욱 그랬다.

뛰어가서 덥석 껴안고 싶었으나 마음뿐이었다. 나는 용감하게 거수경례를 붙이고 주희 앞에 마주 앉았다. 주희도 환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 주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한 줄기 냉소가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인가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어찌 알았으랴! 황홀한 재회의 기쁨을 채 나누기도 전에 주희의 까만 눈이 일그러지며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다시 일어서고 말 줄을….
“아니, 일등병이세요? 병장이라더니…!”

<작가·(사)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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