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가슴에 혼(魂)을 새긴다
자연의 가슴에 혼(魂)을 새긴다
  • 최옥 기자
  • 승인 2009.02.11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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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회]한국중부발전(주) 인천화력본부 율목서각회

강원도 동해시 무릉계곡에는 이곳을 찾은 시인 묵객들의 기념각명(刻名)이 있는 무릉반석(盤石)이 장관이다. 평평한 바위반석 위에 수많은 글자들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본능, 이것이야 말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정월 초하루를 며칠 앞둔 1월 어느 날 인천행 열차에 카메라 가방을 실었다. 한국중부발전(주) 인천화력본부를 찾기 위해서다.

이번에 취재할 동호회는 이름도 생소한 서각동호회. 돌이나 목재, 또는 다른 어떤 소재에 글을 포함한 회화, 선 등을 새기는 것을 ‘서각(書刻)’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서각은 글씨나 소재(원고)를 나무에 붙이고 칼과 망치로 새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회원들을 만나보니 이는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다. 서각에 필요한 소재의 선택, 소재의 성질과 공구 다루는 법, 색체에 관한 지식 등 다방면에서 상식과 경험이 필요한 작업이 바로 서각이다.


한 작품 한 작품 ‘혼신의 힘’

1989년도에 인천화력본부 목우서각회로 시작한 율목서각회(회장 한옥희)는 2003년 9월 1일부로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해 꾸준한 활동을 이어왔으며, 현재 회원수는 15명이다.

특히 회원들 대부분이 호(號)를 1개 이상씩은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다. 호는 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2종 이상의 이름을 갖고자 한 풍속(復名俗)과 본이름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實名敬避俗)에 의해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어진 이름으로, 자신이 붙일 수도, 또 남이 지어줄 수도 있다고 한다.

회원들 모두 자신의 호에 대한 자긍심도 대단했다. 나무에 선을 새기거나 깎다 보면 실수로 이가 살짝 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두고 회원들은 ‘쪽이 나간다’라고 부른다. 정석대로라면 이 경우 다시 대패질을 해 갈아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대개는 주재료인 목재의 가격이 꽤 나가는 탓에 본드 등을 이용해 이가 나간 부분만 붙여 계속 작업을 진행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천 서구 문화예술인 서각분과장을 맡고 있는 최구호 회원은 실수로 쪽이 나가게 되면 새로 밀고 또 잘못되면 다시 밀고 그렇게 몇 번을 새로 시작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런 작품일수록 전시회에 내놓았을 때도 뿌듯한 기분이 배가 되고 애착도 많이 간다는 것. 그는 이를 두고 “호가 있고 선생이 있는데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섬세하면서 역동적인 작업

서각 특성상 칼, 망치 등 험한 도구들을 다뤄야 함에도 여성회원들이 많은 것도 이 동호회의 특이한 점이다.

동호회 총무를 맡고 있는 한예정 회원은 “도구가 다 날카로워 함부로 다루면 옷이나 손을 다치기 쉽다. 망치 다룰 때는 손등을 찧기도 하고 손톱이 나가는 일도 허다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서각은 섬세함을 요하는 활동이란 점에서 여성들과도 잘 맞는 것 같다. 나무와 자신과의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이 이 작업의 가장 큰 묘미라고 생각한다. 나뭇결과 역방향으로 나가면 나무의 이가 나가므로 한순간도 맘을 놓을 수 없지만 한번 작업에 빠지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심취하게 된다”고 말했다.

회원들은 서각만큼 역동적인 예술활동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다른 사업소에서 패러글라이딩 등 야외 레포츠를 즐겼다던 정해진 회원은 서각이 오히려 이런 야외 레포츠보다도 더 역동적인 활동인 것 같다고 말해 인상적이었다.

율목서각회 회원들 대부분이 인천 서구 문화예술인 서각분과 회원으로 등록돼 있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인천시 서구 서곶예술제 1회~13회 전시 참여, 한국서예대전 인천지부 서예대전 회원다수 출품, 제물포 문인화대전 다수 출품, 이규보 선생 서화대전 회원 다수 출품, 그 외 문인화 대전에 회원 다수 출품, 인천화력본부 자제 회원전 8회 참가 등 전문 예술인 모임이라고 할 만큼 상당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동호회 회원 중 최구호 회원은 오는 5월 초대작가로 선정될 예정으로, 기성작가와 견줘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기량을 자랑하고 있다.


소같이 우직하게 기량 배양 최선

서각과 서예는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탓에 율목서각회에는 서예를 함께 배우고 있는 회원들이 많았다.

20년 간 서예를 해왔던 한옥희 회장은 글씨를 쓴 사람이 서각을 하는 게 가장 좋다고 조언한다. 글씨를 쓴 사람의 표현과 생각을 여실히 작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서예를 하지 못하면 글씨를 도록에서 발췌해야 하는데 인쇄물이다 보니 생동감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자신이 직접 화선지에 붓으로 글을 쓴 것을 붙여서 조각을 하게 되면 생동감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글에 담긴 생각까지 여실히 표현할 수 있게 된다.”

한 회장은 또한 올해 기축년을 맞아 회원들 모두가 소같이 우직하게 열심히 활동해서 지역의 공모전에 참가해 성과를 거뒀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실력 있는 회원은 지역 기성작가에 못지 않는 실력을 닦아달라는 당부다.

“올해는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한껏 끌어올려 가을과 연말쯤 대대적인 전시회를 열어 이를 대내외적으로 알릴 계획이다. 특히 서울 양재동에 있는 한전아트센터를 활용해 우리 회사의 문화를 지키면서도 대외활동을 열심히 해 실력을 평가받고 싶다”고 한 회장은 올해 포부를 밝혔다.

율목서각회 회원들 대부분은 단지 나무 내음이 좋아 관심을 갖게 된 것이 활동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다른 어떤 예술 활동에 비해 성취욕이 매우 높은 예술이다.” “서예가 자기표현기법을 기르고 자연에 순응하는 거라면 서각은 자연을 조각하는 것이다.” “올해는 작품 한 점씩이라도 완성해 전시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서각 활동 경력이나 전시회 참가 횟수는 회원마다 전부 다르지만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품고 있는 열정은 똑같이 뜨거운 율목서각회 회원들. 그들이 나무에 알알이 새겨온 것은 단순한 글이나 선이 아닌 정성어린 그들의 혼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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