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과부
여우와 과부
  • epj
  • 승인 2009.02.11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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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마당⑥]

사냥대회를 마치자마자 우리는 차량 다섯 대로 나누어 타고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나는 어제 올 때 모시고 온 노엽사(老獵師) 한 분을 다시 내 승용차로 서초동 자택까지 모셔다 드리는 임무를 맡았다.

그 노인은 뒷좌석에 앉자마자 엎드려서 바닥을 살폈다. 어제 올 때 잃어버렸다던 반지를 찾는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서울에 가서 꼭 찾아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 앉아계세요”

나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려다가 ‘아차!’ 싶어 도로 집어넣었다.
“오래 살고 싶거든 담배부터 끊어. 그리고 반지는 꼭 찾아야 돼. 틀림없이 차안에 있을 거야.”
내가 담배 꺼내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어제 올 때도 거의 두 시간 동안 담배를 피우지 못했는데….

어제 오면서 연세를 물었더니 노인은 대답 대신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었다. 아흔두 살이었다. 걸음걸이가 약간 어눌하고 더딜 뿐 아주 정정했다. 시력은 사십대인 나보다도 더 좋았다. 오면서 고속도로에 붙어있는 표지판을 죄다 읽어 주셨으니….

어제, 숙소인 원주관광호텔에 도착하고 나서 조금 있으니 그 노인이 우리 방으로 찾아왔다. 끼고 있던 반지가 없어졌다는 거였다. 오면서 차안에 떨어뜨린 것 같단다.

‘혹시 집에서 안 끼고 오신 거 아니어요?’ 하고 물었지만 노인은 틀림없이 끼고 왔단다. 호텔방에서 세수를 하다가 보니까 없더란다. 올 때 차안에서 장갑을 벗었는데, 그때 떨어진 것 같다는 거였다.

‘옛날에는 손가락에 꼭 맞았는데 이젠 야위어서….’ 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차안을 샅샅이 뒤져서 꼭 찾아드리겠다’고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나는 노인이 불안해 할까봐 우리 일행의 차들을 모두 앞으로 보내고 맨 뒤에서 천천히 몰았다. 노인이 옛날얘기 하나를 풀어놓았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부친을 따라 사냥을 다녔다고 한다. 묘향산 부근에서 호랑이를 본 적도 있고, 강원도에서는 이리떼의 공격을 받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사냥에 미쳐서 잘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직업사냥꾼이 되었다고 한다. ‘서 포수’ 하면 그의 고향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단다.

한번 사냥을 나가면 일주일은 보통이고, 어떤 때는 한 달이 넘어서 집에 돌아올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땐 한번 나갔다 하면 멧돼지나 노루를 대여섯 마리씩 잡아왔단다. 마흔두 살 때, 사냥을 나갔다가 근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마누라가 병들어 죽어서 이미 사흘 전에 장례식을 치뤘더란다.

충격을 받은 그는 총을 팔아치우고 신세한탄을 하며 백수건달로 몇 년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냥밖에 없었다. 결국 다시 총을 잡았는데, 어느 해 겨울 여우가 나온다는 영월 근처에 사냥을 나갔다가 산골마을의 한 과부집에서 밥을 얻어먹고는 그 과부에게 온통 마음을 뺏기고 말았단다.

이십대 후반의 그 과부는 대여섯 살쯤 되는 아들 훈이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미모가 아주 출중했다고 한다. 그 과부는 주위에서 남자들이 온갖 수단으로 유혹을 해도 흔들리지 않고 굳게 절개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도 상사병을 앓으며 겨울 내내 그 집 주위를 맴돌며 속만 태우고 있었다고 한다.

봄이 되자, 산골 마을의 부녀자들은 자주 약초를 캐러 산으로 올라갔다. 어느 날 오후, 그 과부가 아낙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도 뒤를 밟았다.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 그 과부는 동행했던 아낙들과 떨어져서 혼자 약초를 캐고 있었다. ‘옳지! 이때다.’ 드디어 기회를 포착한 그는 열 걸음 정도 뒤까지 살금살금 다가가 총을 겨누며 큰 소리로 외쳤다.

“꼼짝 마라! 이곳에 구미호가 한 마리 있다더니 오늘에야 만났구나. 이놈이 곧잘 여자로 둔갑하여 사냥꾼을 홀린다더니 오늘은 훈이 어미로 둔갑했구나. 요놈! 잘 만났다.”
그는 당장에 총을 쏠 기세로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과부는 곧 그를 알아보고 반가운 듯 말했다.
“아이고. 서 포수 양반, 저는 여우가 아니고 훈이 어미입니다.” 그러나 그는 총의 노리쇠를 철커덕 하고 당기며 더욱 큰 소리로 말했다.
“고놈 말도 잘 한다. 목소리까지 훈이 어미 흉내를 내는구나.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나를 속이지는 못해!”
“아니어요. 저는 틀림없이 훈이 어미예요. 아이고! 이를 어쩌나….”

하얗게 질린 그 과부는 온갖 말로 자신이 훈이 어미임을 설명했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오냐,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다. 여우가 둔갑하더라도 꼬리만은 완전히 없애지 못한다고 한다. 엉덩이를 보면 여우인지 사람인지 금방 알 수가 있다. 너의 엉덩이를 내게 보여라. 다섯을 셀 때까지 보이지 않으면 여우라고 단정하고 총을 쏘겠다. 하나, 두울, 세엣….”

그가 셋까지 세자 다급해진 과부는 ‘잠깐요’ 하며 바지를 내렸고,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속곳까지 내렸다. 눈이 부실 만큼 하얀 속살…. 그제서야 그는 겨누었던 총을 거두며 멋쩍은 듯 말했다.

“진짜 훈이 어미가 맞구먼.” 다시 옷을 추스른 과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결코 보여서는 안 될 속살을 외간남자에게 보였으니 얼마나 부끄럽고 억울하겠는가. 그는 다가가서 정중히 사과하고 애끓는 마음을 호소했다.

“미안하오. 훈이 어미를 향한 내 마음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장난을 좀 쳤소. 나와 혼인해주시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하산하여 백년가약을 맺었고, 어제 잃어버린 반지가 바로 그 여인과 혼례를 올리면서 증표로 받은 반지라고 한다.
“마누라는 이제 칠십 조금 넘었어.”

차가 그 노인 집 앞까지 왔다.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뒷좌석 밑과 차 바닥을 샅샅이 뒤졌다. 조수석 밑에서 약간 일그러지고 색깔이 바랜 금반지가 나왔다. 반지를 건네주자 노인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노인이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라며 자꾸 집에 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먼저 간 일행이 기다리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사양했다. 솔직히, 노인의 부인이 된 그 과부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지만 그녀도 이제 칠십 노파, 그냥 머리 속으로 상상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차에 올랐다.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후-’ 하고 한 모금 길게 내뿜었다. 얼마나 참았던가. 그때 문득 ‘오래 살고 싶거든 담배부터 끊어.’ 하던 노인의 말이 뇌리에 스쳤다. 나는 담배를 다시 재떨이에 쑤셔 넣었다.

<작가·(사)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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