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생’에서 CEO가 되기까지 조명개발에 바쳐온 외길 인생
‘알바생’에서 CEO가 되기까지 조명개발에 바쳐온 외길 인생
  • 한동직 기자
  • 승인 2007.05.03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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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 인] 금오전기 대표 이채운

이채운 대표가 공장에서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넓은 바다 가운데 떠있는 오징어잡이 배 한 켠에 붙어 앉아 저는 등불을 만지면서 생각했어요. 대낮처럼 환한 불빛을 좇아 오르는 오징어 떼, 저 수면 위로 솟아오르면 어부들의 가슴에도 등불이 하나씩 켜진다고…” 울렁거리던 속내도 하루, 이틀 밤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새로 고친 조상기를 돌리는 어부의 손길 바빠지는 여명이 오면 저 뭍 바다로 문이 난 벽돌집 창에는 어김없이 등불이 하나 켜진다. 어부의 가슴에 담긴 그것과 똑같은 등불이…

우리의 봄은 외로워서 언제나 바람과 같이 다니는가 보다. 여름이 오기까지 지나가는 자리마다 바람이 불어오지 않은 적이 없는데 평택을 가는 길에도 길목마다 가득 꽃이고 온통 바람이다.

오전의 봄 햇살에 얼굴을 그을리며 닿은 곳은 화성시와 바로 인접해 있는 농공지역, 지명 상으로는 평택에 속해 있다. 거의 목적지에 다 도착해 농로를 따라 가다보니 야산마다 조립식으로 지은 공장들이 보이고 석재를 쌓아 깔끔하게 옹벽을 친 공장 하나가 눈에 뜨인다.  

정문에는 ‘금오전기’라는 은빛 스테인리스 간판이 눈부시게 빛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이 회사가 조명회사임을 알 수 있는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 점심시간이라 자리가 텅빈 공장 이층 사무실을 지나자 문이 활짝 열린 사장실 의자에 당당히 앉아 열심히 PC를 뒤지던 이는 벌떡 일어나 반갑게 손을 내민다. 비굴하지 않으려 항상 노력해 왔던 그 당당함이 지금의 이채운 사장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군포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서울에서 자랐으니 자신은 서울사람이라며 너털웃음을 짓더니 “서울사람에게 고향이 있긴 있나요”라며 되묻는다. 고향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만 하도 빠르게 변해 버린 대도시의 모습에서 고향냄새를 맡을 수 있기를 기대하는 건 처음부터 아예 무리가 아닐까.

집에서는 형제 중 장남으로 많은 기대를 받아 스스로도 어긋나지 않으려 노력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 사장이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초 산업계의 시대 흐름은 60년대의 중공업시대를 넘어 전기, 화학, 기계산업이 경제를 지배하던 70년대를 지나 전자, 통신 분야가 첨단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의욕적인 사람에겐 기회가 되기도 하는데 아주대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한 이 사장 자신은 “마음껏 지식의 우물을 길어 배운 걸 사회에 나와 요긴하게 썼다”고 표현했다.

그런 그가 조명업계에 발을 딛게 된 건 어쩌면 필연적인 운명일지도 모른다. 대학 4학년 여름, 방학을 맞아 산학협력의 일환으로 부천에 있던 금오전기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게 됐는데 그것이 이 사장 평생의 운명을 결정하고 말았다.

“그 당시, 일을 하며 아르바이트니까 그냥 대충해도 되겠지 하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제 일같이 제 직업같이 열심히 일했던 게 후에 그 회사에서 졸업도 하기 전 저를 다시 부르게 된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소에서 개발작업을 지켜보고 있는 이채운 대표.
특히 청계천 전기상가 골목에서 장사하며 밑바닥에서 출발해 회사를 일으켜 성공한 창업주 이순학 사장의 믿음이 청년 이채운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남들은 운이 좋았다고 말 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의 조명업계에는 대학물 먹은 사람이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희귀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 불모지 같은 분야에서 내 꿈이고 이상이었던 엔지니어의 길을 시작해 성공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확신할 수가 없었지만 조명업도 언젠가는 등불처럼 빛이 날 때가 있을 거란 생각과 제 능력을 믿어주는 곳에서 소신껏 일해 한 번 최고의 자리에 서보고 싶다는 강한 승부욕이 생기더군요.” 그날 이후 그는 기술개발실에 의자 하나를 차지하게 됐다.

초임자의 일은 누구에게나 힘들지만 새로 쏟아져 나오는 개발 프로젝트를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10시 이전에 퇴근하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요즘은 주 5일 근무로 금요일 오후면 대부분의 회사가 쉬지만 실제로 처녀 총각들이 연애할 시간이 없어 결혼을 못하는 경우가 그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

더구나 85년도쯤에 국내 최초로 성공한 오징어잡이 집어등용 메탈할라이드 램프와 오징어를 낚아 끌어올리는 장비인 조상기 개발로 시작된 지방 출장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제품 소개를 위한 프리젠테이tus(시연) 때문에 뛰어다녀야 했고 등과 기구가 많이 보급되자 그 다음엔 유지 보수가 일이었다.

오징어잡이 배 안에서 일은 커녕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듯한 멀미로 처음에는 돌아와 쓰러지기도 했고 구룡포에서는 제품에 하자가 있어 문제점 해결을 위해 20일간 먹고 자며 지내기도 했다. 또 흑산도에서는 풍랑을 만나 오도 가도 못하고 섬에서 10일간이나 고립되기도 했다.

그런 저런 과정을 거치며 일과 씨름하는 사이 그는 기술개발실을 책임지는 자리에 앉게 된다. 조명 설계에 시뮬레이션 기법을 사용케 되고 열악한 환경도 개선하며 부서를 잘 끌어가고 있을 그 무렵 창업주인 이순학 사장이 갑자기 사망하고 그 후 소위 창업 2세가 대를 이어받아 경영을 하게 됐는데 그도 잠시였다.

제조업에 별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2세 경영주는 경영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회사는 반도체·전자부품 분야와 조명분야를 쪼개 매각을 준비했고, 자연히 직원들의 동요가 뒤다랐다.

그 당시에는 5~60년대 고물상전에서 15~6세부터 밑바닥의 일을 배우며 자수성가한 많은 창업주들이 고령화하면서 2세 경영이 늘어나는 추세였는데 부동산업이 번성하며 힘을 안들이고도 큰 돈을 벌 수 있게 되자 많은 2세 경영인들이 제조업을 포기하고 투기 쪽으로 몰려갔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어렵게 키운 회사를 헐값에 넘기는 것도 그렇고 정말 이 조명업에 신념이 있고 가치를 더욱 창출할 수 있는 사람이 회사를 맡아야 한다는 게 소신이었습니다.” 결국 2001년 뜻이 맞는 직원 몇 명과 함께 자금을 투자해 조명분야를 인수했다.

이 사장은 CEO에 올랐고 기존의 안정기 개발과 공장, 회사 등에 공급되는 조명 납품사업을 지속함은 물론 조명설계에 있어 시뮬레이션 기법을 더욱 개발하고 경관조명과 각종 스포츠센터 및 골프장, 공장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혀 나갔다.

2년 후에는 2000평의 대지에 현재의 공장을 세워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설비를 투자해 직원 21명에 60억의 매출을 올리는 짭짭한 회사로 성장했다. 물론 요즘도 어려움은 있다. 젊은이들이 편한 생활에 익숙해 있어 어려운 일을 하지 않으려 들고 외국인 산업연수생들도 체류기간(3년)이 너무 짧아 일을 배울만하면 나가는 통에 생산라인의 직원수급 문제가 가장 큰 어려움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회사에 이익이 되고 지역사회 발전에도 도움이 되도록 동네 주민들을 고용해 효과를 보고 있다. 또한 절전형, 양방향 가로등·보안등 원격감시시스템을 중기청 과제로 추진하고 있고 음이온 발생 삼파장 램프, 경관조명과 골프장 조명시설, LED, 무전극램프, 세라믹메탈할라이드를 중점 개발 추진 중인데 무전극램프의 안전기는 이미 특허를 획득했다.

특히 이번에 농림부 기술개발 과제로 채소와 화훼류 등 작물의 생산성 증대와 품질향상을 위해 온실재배 시 광합성 작용의 증진에 필요한 적합한 광원과 광량을 제공하는 제어시스템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 연구개발로 이 사장은 FTA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농민들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고 또한 멀지 않아 어부들에게도 수명이 길고 뜨겁지 않은 집어등이 개발될 날도 곧 올 것이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이채운 대표가 직원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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