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양념으로 버무린 감동밥상!
웃음 양념으로 버무린 감동밥상!
  • 신선경 기자
  • 승인 2008.10.16 10: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멋이 있는 공간]‘우동 한 그릇’

대학로에서 몇 년 째 조용한 관객몰이를 하는 작품이 있다. 극단 김동수 컴퍼니의 ‘우동 한 그릇’이 바로 그 작품이다.

2003년, ‘소설 보여주기’라는 생소한 컨셉을 가지고 시작한 ‘우동 한 그릇’은 끊임없는 진화를 통해 6년째 관객과 소통을 하고 있다. 한 공연장에서 2년 이상 장기 공연을 하는 것은 대학로에서 힘든 일이기에 그 의의가 또한 깊다.

150석 남짓 되는 소극장에서 공연 되어 지고 있는 ‘우동 한 그릇’은 15만 명 이상의 관객과 눈을 맞추었다. 이제는 대학로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우동 한 그릇’은 관객들의 요구로 장기공연을 계속 이어가는 공연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급변하는 각박한 이 시대에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는 희망과 살가운 인간애를 그리워하는 요즘 사람들의 작고 소박한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우동 한 그릇’이 끝없는 형식실험의 진화를 거듭하면서 20차 공연에 돌입한다.

이렇게 연극 ‘우동 한 그릇’이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원작 소설인 단편 ‘우동 한 그릇’을 일체의 각색 없이 원문 그대로 풍성하고 짜임새 있는 실험극으로 올렸다는 것과 배우들의 따뜻하고 진실 된 앙상블 연기를 보여 준 것에 기인 할 것이다.

모든 희곡은 배우들의 대사와 지문으로만 구성이 되어있는 반면, ‘우동 한 그릇’은 소설을 읽어주는 Fiction Live라는 형태에다 연극적 행위를 보탠 ‘소설 보여주기’라는 생소할 수 있는 장르로 관객에게 접근하며 기존 공연 형식의 틀을 과감히 벗어버렸다. 장르의 생소함과 섬세한 연출의 터치, 배우들의 연기는 묘하게 어우러져 관객을 웃고, 울리며 극의 재미를 배가 시킨다.

우리말로 “배려”라는 뜻을 가진 ‘기쿠바리’의 상인정신, 그리고 세모자가 보여주는 가족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그리움으로 자리 잡고 있는 단어이다. 70여분이라는 짧은 공연시간 동안 보여주는 에피소드 안에는 각박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들을 모두 보여 준다. 

또한 영화나 소설을 통해서는 보여줄 수 없는 특유의 연극적인 기교와 무대 활용을 통해 품’이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보여 주고 있다.

상도 전하는 따뜻한 마음!

‘우동 한 그릇’은 ‘한 그릇의 메밀 국수’란 원제의 우리나라 번역판으로 잔잔한 감동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상인 정신’을 배울 수 있다. 한 그릇을 주문한 세모자에게 주인은 ‘반덩이’의 우동을 얹어 주었다. 왜 ‘반덩이’일까?

전직 문화부 장관인 이어령 교수는 ‘일본인의 상인정신’이란 글에 바로 이 이야기를 전재하면서, 세모자에게 150엔을 받고 우동 1인분에 반 덩이를 더 얹어 주는 그 정신, 상도(商道)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인정이 살아있는 상인의 정신이 바로 일본을 경제 대국으로 이끈 정신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섣달 그믐날이면 우동을 먹는 풍습을 지킴으로써 남편 없이 키우는 아들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려고 했던 과부는 바로 일본인의 상인 정신에 힘입어서 미래의 성공을 기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두를 살리는 ‘상도(常道)’ 바로 그것이 일본의 힘이며, 더불어 우리의 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정신이기도 하다.

또 이렇게 손님을 배려하는 상인의 마음은 일본의 ‘기쿠바리’라고 할 수 있는 데, 이것을 우리말로 하자면 ‘배려’에 가깝고, 실질적인 뉘앙스로는 ‘눈치’에 가까운 말이다. 이 눈치라는 말은 일본의 경우에는 자발적으로 자기 쪽에서 신경을 써주는 적극적인 윤리 범주에 들어가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장사하는 사람들이 손님에게 물건을 팔 때의 서비스 정신 그리고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 그것을 사용하는 소비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기쿠바리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의 경우, 왜 그 여자 손님이 하필 남이 문을 닫을 시각에 ‘북해정’에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풀어 주는 낱말이 바로 이 기쿠바리인 것이다. 또한 손님들이 다 가고 없는데도 그 여인은 “저, 우동 1인분인데 괜찮을까요?”라고 머뭇거리며 이야기하고 엄마 뿐 아니라 우동 1인분을 주문할 때 형제의 표정에는 겸연쩍어 하는 빛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표정, 말투, 몸짓, 그것을 한마디 말로 나타낸 것이 기쿠바리다. 이는 섬세한 상호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그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 기쿠바리의 연출은 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눈치 채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 연출이 붕괴된다.

이 인간관계에서 기쿠바리가 없었다면 ‘우동 한 그릇’은 태어나지 않는다. 

세모자 ‘북해정’에 찾아오다

‘북해정’이라는 작은 우동 집은 해마다 12월 마지막 날이 되면 손님들로 붐빈다. 가게가 문을 닫을 무렵 그곳에 남루한 차림의 세모자가 들어와서 단 한 그릇의 우동으로 배를 채우고 간다. 그 후에도 12월 마지막 날이 되면 세모자는 ‘북해정’을 찾고, 다정하고 따뜻한 그들의 모습에 주인은 보이지 않는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다음 해 12월 마지막 날, 주인은 우동을 먹으러 올 세모자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지만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이후 몇 년이 지나도 그들은 ‘북해정’에 다시 오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들 모자를 기다리는 주인은 그들의 자리를 언제나 비워뒀고 이러한 사연은 단골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다. 그저 추억으로 세모자에 대한 기억이 남겨질 무렵, 그들은 다시 우동 집에 나타난다.   

두 아들은 장성한 청년의 모습으로, 그리고 엄마는 제법 말쑥해진 모습으로...

이제 그들은 한 그릇의 우동이 아닌, 떳떳한 세 그릇의 우동을 시켜 놓는다. 그리고 우동 집 주인이 베풀어 주었던 따뜻한 배려와 마음에 대해 고마움을 전한다. 그렇게 ‘북해정’의 섣달그믐은 훈훈함으로 젖어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